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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들의 환한 웃음이 바로 행복입니다.
ⓒ 김정혜
설문지를 내민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혹여 이 설문이 어르신들께 상처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곁에 붙어 앉아 10개나 되는 문항들을 조목조목 짚어 드린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어르신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내 부모의 깊은 가슴팍을 이렇게라도 대신 들여다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꿎은 생 연기만 피워 올리던 하얀 담뱃재가 새털 같은 가벼움 조차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툭 떨어지면 그때서야 긴 상념에서 깨어나시는 아버지. 대뜸 '부모가 애물단지구나'하신다. 자식에게 부모가 애물단지라니…. 무슨 애달픔이 그리도 깊으신 걸까. 바라보는 딸자식의 가슴은 순식간에 새까만 숯덩이가 된다. 그럴 때면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 설문지를 작성하기 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신 할아버지.
ⓒ 김정혜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은 애달픔에 늘 가슴이 짠하고, 부모에 대한 자식 사랑은 죄스러움에 늘 숯검정이 되는 것. 결국 천륜이라는 것은 애달픔과 죄스러움 사이에 아주 깊이 뿌리박힌 사랑의 옹이 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5월25일 오전 10시 '김포시노인복지회관'. 1층 로비에서부터 4층 어울마당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여가를 즐기고 계시는 어르신들 한 분 한 분께 설문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설문을 시작하기 전, 한결 같은 질문 하나. 바로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지?'였다. 그 물음에 왜 그리 가슴이 짠해지던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란 다짐 하에 드디어 설문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성함은 안 적으셔도 되는데 연세는 좀 적어 주시겠어요."

대 여섯 번 그 말을 되풀이 하면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설문에 응하시는 대다수의 어르신이 70대이다. 그럼에도 아주 정정한 모습이다. '고령화 사회'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더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르신들한테는 그 정정하다는 표현조차 조심스럽다.

"시켜만 주면 뭐든 할 수 있는데…. 도대체가 우리 같은 늙은이는 할일이 없어. 그러니 매일 밥만 축내고 있는 거지. 그러니 그 정정하다는 소리가 어떨 땐 욕으로 들려."

먼저,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라는 첫 번째 문항이다. 이 문항은 핵가족이라는 요즘의 가족 형태에 대해 어르신들의 의중을 알아보고자 하는 문항이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부부가(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번호에 동그라미를 치신다. 이는 자식들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르신들께 그 이유를 물어봤다.

▲ 설문지를 작성하고 계시는 할머니. 생각이 깊으신 듯하다.
ⓒ 김정혜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부모로서 변변하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자식 어깨에 짐까지 지워 주면 안 돼지."

어르신들의 한결 같은 대답이다. 그런 어르신들의 깊은 속내는 결국 부모로서 경제적으로 떳떳하다면 자식들과 함께 살수도 있다는 말씀일 것 같아 한 번 더 여쭤 봤다. 만약 경제적으로 당당하다면 자녀와 함께 살고 싶은가에 대해. 대다수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동의에 경제적인 당당함이 곧 부모로서의 당당함이라는 서글픈 현실에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자식한테 손 벌리지 않고도 먹고 살만한데 굳이 자식들과 불편하게 함께 사느냐며 손을 내젓는 분도 계신다. 자식하고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그 속내가 어쩌면 자식들을 향한 서운함은 아닐지 한 번쯤 되짚어 보게 된다.

또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알리고 싶으세요'라는 재미있는 문항도 있다. 나이 들수록 서로 등 긁어 주는 부부가 최고라더니 역시 자식보단 부부가 최고인가 보다. 다들 배우자에게 먼저 알리겠다고 하신다. 한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당신 혼자 원 없이 한번 실컷 써 보겠다고 대답한 어르신도 계신다. 왜라고 묻는 이유에 대해 끝내 그 속내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자식에게 부모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문항이다. 여기서 어르신들이 생각하시는 합당한 대우라는 건 뭘까. 두둑한 용돈? 좋은 옷과 진수성찬? 철철이 꽃놀이에 단풍놀이? 아니다. 어르신들께서 말씀 하신 건 '관심'이었다. 특히 자식들 안부 전화 한통이, 손자 손녀들 안부 전화 한통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하신다.

▲ 설문 내용을 일일이 짚어 드리며 할머니의 깊은 속내를 들어 봤다.
ⓒ 김정혜
10가지 문항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 가며 설문을 받는 과정에서 더러는 신세 한탄에 한숨이 꺼지는 어르신도 계시고 더러는 이 세상에 돈이 최고이니 하다못해 빈 통장이라도 들고 있어야 부모 대접 받는다며 쓸쓸해 하는 어르신도 계셨다. 거기다 아예 붙들고 앉아 당신 살아온 이야기에 효 사상까지 열변을 늘어놓는 어르신도 계셨다. 설문을 마치고 복지관을 나서는 길, 어르신들의 넋두리가 귓가에 쟁쟁거린다.

"자식?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지."
"몸은 늙고 병들었어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야."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이지. 늙어 봐야 우리 마음 이해할 수 있어."
"자식들한테 손 벌리고 싶은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우리 같은 늙은이도 충분히 용돈 벌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넋두리 같은 하소연에 죄스러움이 앞선다. 골 깊은 주름인들 그냥 패였을까. 서리꽃 같은 백발은 그냥 덮였을까. 늙음이라는 두 글자 앞에 그건 당당한 훈장이건만... 어르신들을 뒤로 하고 복지관을 나서는 두발이 육중한 추를 매단 듯 너무 무겁다.

#노후대책#고령화#노인문제#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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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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