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① 5.3 인천 항쟁
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 추진 인천지부 결성식이 광주 학살, 독재 정권 타도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5만여 시민. 학생들의 집회에 경찰은 폭력 진압을 서슴지 않았으며 극렬좌경세력의 난동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구속자 11명 수배자 14명으로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는 기록하고 있다. 수배자 명단에 장기표. 박계동. 장영달. 이우재. 이강철씨 등 이름을 찾을 수 있다.
②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
86년 이재호·김세진 열사가 전방 입소를 거부하며 분신하고 4월 28일 이동수 열사가 분신했다. 당시 민통련 의장이셨던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 어린 호소문이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에 실렸다.
"어제 장렬하게 산화한 이동수 열사는 살아야 하고 이 늙은 문익환이가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갔고 나는 또 욕스럽게 살아남았습니다…."
민중의 등불이셨던 문익환 목사님 그 절규가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행 <민중의 소리> 제17호)
③ 87년을 준비하기 위한 86년
전국 어디랄 것도 없었다. 딱히 어느 계층이랄 것도 없었다. 농사꾼, 노동자, 학생, 자영업자 모두가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다. 서울,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인천, 대구, 대전 등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연일 최루탄이 작열하고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그러나 독재타도 투쟁은 식을 줄 몰랐다.(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행 <민중의 소리> 제16호)
④ 용공조작, 불법 감금, 고문
대규모 집회에 정권은 온갖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고문 폭로를 당시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김문수씨는 초전박살 났어! 그놈들은 인간백정들이었어! 라는 말로 입을 열고 연행되는 차 속에서 짓밟히기 시작해서 송파보안서에 도착해서는 야구방망이로 온몸을 구타당했다 한다. 그리고는 전기고문 2차례,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코에 붓기 5차례. 일주일 동안의 전기 몽동이 구타 등으로 5.3인천 투쟁과 관련한 허위자백과 수배자 거처 자백을 강요받았다 한다."(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에서 발췌)
지금 김문수 지사는 그때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 그 정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김문수 지사는 그 정권을 용서했을까?(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행 <민중의 소리> 제17호)
⑤ 농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수입 농산물 수입, 재벌 위주의 정책은 농업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대규모 농민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정권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농민들에게 사탕발림을 했다. 그 사탕발림에는 TV, 신문 등이 동원되었다. 9시 땡 하면 '전두환 대통령 각하는~~' 뉴스를 시작한다고 해서 '땡전 뉴스'라 했다. 한 편의 만화가 지금 농촌, 농민 처지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⑥ 되살아나라, 4월 혁명의 뜨거운 가슴이여!
"올해는 우리 민중과 민족운동 민족민주운동 세력에게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승리에 한걸음 성큼 다가서는 전진의 해가 될지, 다시금 실패와 좌절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해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투쟁에 달려있습니다. 4월 혁명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5월 광주에서 거세게 굽이쳐 솟았듯이 87년 또한번의 격장을 예고하고 있습니다."(민주화운동청년연합 자료집 <민주화의 길> 제16호 뒷면)
민청련 운영위원회 집행국장으로 이범영, 자문위원으로 김근태, 지도위원으로 계훈제 선생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⑦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었다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거의 날마다 집회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대학은 수업거부를 결의하고 시내로 몰려나왔다. 당시 대구에서 발행된 유인물의 투쟁일지에서 집회가 얼마나 대규모로 강고하게 이루어졌는지 엿볼 수 있다.
6월 18일 각 대학 "살인 최루탄 추방을 위한 공청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중앙파출소 앞 시민 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가두 행사로 약식 진행. 이날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35000 인원과 격렬한 민주화 투쟁이 전개, 이날 시위는 시민들에 의해 주도되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남.(남부경찰서장 승용차 전소. 경찰차 부숨. 파출소 7곳 전소)
⑧ 6월 항쟁은 국민적 승리의 첫 단계
6월 항쟁이 6.29선언으로 마무리 되면서 운동 진영 내부에서 평가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견은 있었지만 평가의 주는 '국민의 첫단계(부분적) 승리. 노태우와 미국의 전술적 후퇴'라는 데 모아졌다. 이런 평가는 이후 반미자주화 투쟁이 전면화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민중들은 광주 학살을 방조하고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의 실체를 서서히 알게 되어 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당시 학교에서 뿌려진 유인물 대부분도 6.29선언에 만족하지 말고 자주 민주 투쟁에 떨쳐 일어나자는 호소를 담고 있다.
⑨ 대학가 전방입소 거부 투쟁
6월 항쟁 전후로 각 대학에서 일어난 전방입소 거부 투쟁은 남북이 총칼을 겨누는 분단교육을 거부하는 투쟁이었다.
"조국을 빼앗기고도 빼앗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지금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적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남의 나라 손아귀에 있는데 우리 민족의 군대의 지휘권은 당연히 우리민족이 쥐고 있어야 하는데, 병영입소 군사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학내 유인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