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따져보면 마찬가지겠지만 미국엔 일 년 내내 스포츠 경기가 없는 날이 없다. 가을이면 미국민 전체가 열광하는 풋볼이 매주 벌어지고 그게 끝나면 농구를 비롯한 실내경기들이 이어지고 봄이 되면 야구가 뒤를 이어준다.
이 일정을 따라 대학이나 고등학교 경기도 동시에 같은 종목들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민 전체의 일상이 톱니바퀴처럼 스포츠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중 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풋볼(미식축구)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경기라서 그런지 미국민들의 애착은 대단하다. 1880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룰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32개 팀이 양대 리그로 나뉘어서 경기를 하는데,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 수는 1년에 딱 16게임이다. 풋볼의 경기 수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경기장 표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이베이(인터넷 경매 사이트) 같은 곳에서는 10배씩, 때로는 그 이상의 가격으로 경기장 표가 경매에 나온다. 슈퍼볼 경기가 있을 무렵이면 텔레비전 광고조차 다 슈퍼볼이 주제다.
뉴욕 양키스 대 보스턴 레드삭스
풋볼만큼은 아니지만 미국민들에게 인기있는 스포츠는 야구다. 야구도 역시 그 기원은 영국의 크리켓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운 스포츠라는 점에서 미국의 스포츠라 할만하다. 풋볼과 달리 야구는 거의 매일 경기가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직접 즐길 기회가 많은 스포츠다. 양대 리그로 나뉜 30개의 팀이 팀당 162경기를 하는 것이니까 그만큼 기회가 많은 셈이다.
지난해 미식축구 경기를 한 번 보았으면 했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야구경기만큼은 한 번 가서 보리라 마음먹고 있다가 마침내 지난주에 보러 갔다. 박찬호 선수가 메츠 라운드에 서면 경기를 한 번 보러 가리라 생각했는데 요즘 마이너리그에서도 그 모습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어서 기대난망. 그래서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를 보러 갔다.
양키스 스타디움은 차로 움직이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전철이 경기장 바로 앞에 있지만 내가 사는 곳은 전철이 없는 곳이라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저녁 7시 경기지만 두 팀 간의 경기는 늘 사람이 많은 관계로 주차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고 좀 일찍 나섰다. 오후 5시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경기장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변에 늘어선 스포츠 바에는 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맥주 한 잔씩들 들고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눈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끼리 온 것 같다. 경기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그렇게들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조금 일찍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자리는 상당히 높은 곳에 있다. 제일 싼 편에 속하는 자리다. 자리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고 서비스도 달라진다. 내야와 가까운 곳은 주문도 받아준다. 경기장 안에는 여기저기 음료와 맥주를 파는 곳과 기념품 파는 매장들이 늘어서 있다. 빈 좌석이 그렇게 많더니 저녁 7시가 되니까 직장에서 경기 시간에 맞추어 온 사람들이 그 무렵 입장하면서 경기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빼곡히 차버렸다.
경기보다 재미있는 관중석 싸움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보스턴이 3점을 내버렸다. 박찬호가 잘나가던 시절, 상대팀 투수로 잘 나간다고 들었던 마이크 무시나가 마구 홈런을 맞는다. 내가 앉은 곳은 3루 쪽으로 보스턴의 응원석이지만 보스턴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양키스 팬들이 자리 잡았는데, 1회부터 보스턴이 점수를 내자 숫자는 적지만 보스턴을 응원하는 팬들이 신이 났다.
경기 내내 일어서서 소리 지르며 의기양양이다. 양키스 팬들이 그 꼴을 보려 하겠는가? 야유가 이어지고 야유에 굴하지 않는 보스턴 팬을 향해 누군가 뭘 집어던진다. 먹을 거였는지 받아서 입에 넣고는 또 던지라고 충동이고 계속 날아온다.
결국 경찰이 올라왔다. 몸싸움으로 간 건 아니었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는 일이라고 본 건지 보스턴 팬을 나오라고 하더니 데리고 가고 이어 물건을 집어던진 양키스 팬도 불러낸다. 경기장 경비가 이미 다 얼굴을 봐두고 콕 집어낸다.
보스턴 팬은 신체 좋은 남자였는데, 양키스 팬은 경기 내내 갈라진 소리로 '렛츠고 양키스'를 외치던 여자다. 이 여자, 일어서서 나가면서 손을 위로 하고 계속 외친다. 지금 7대 2로 지고 있는데…. 완전 이날의 영웅이다. 양키스 팬들의 박수와 함성이 그 여자한테 쏟아지고 그 여자는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이날, 경기보다 관중석의 움직임이 훨씬 재미있었다.
잘못하면 몸싸움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양쪽 팬들이 아슬아슬한 선에서 멈춘다. 아니 또 그렇게 멈추도록 적절한 시기에 경찰이 제지를 한 셈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웃으면서 구호를 외치며 나가는 그 여자 모습에 나도 웃음이 절로 난다.
경기는 형편없이 졌지만 3루 쪽에 앉았던 양키스 팬들은 이 모습을 보며 마치 이긴 것처럼 즐거워한다. 그래도 보스턴 팬들은 기죽지 않는다. 8회에 접어들어서도 변화가 없자 여기저기서 양키스 팬들이 일어나 경기장을 나서니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댄다.
이들은 연신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춤추고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우리처럼 치어리더도 없고 응원단장도 없지만 경기장 전광판이 치어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광판에 '렛츠고 양키스'가 뜨면 구호를, 손뼉 치는 모양의 손바닥과 음악이 나오면 박수와 동시에 열광한다. 상대팀에 대한 야유도 전광판이 리드한다. 홈경기다 이거다.
팬들을 제대로 발산시켜야 돈도 번다
미국의 구단들은 대부분 구단운영으로만 돈을 번다. 이 구장의 수입과 선수들의 이미지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만큼 구단과 선수들이 팬들과 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다. 제대로 소비하게 하고 제대로 발산하게 해야만 돈을 번다.
선수들의 움직임, 기록이 소비의 대상이다. 경기장을 매개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인종차별을 이겨 낸 재키 로빈슨의 이야기며, IMF 때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거리를 안겨주었던 박찬호의 이야기처럼 대공황으로 상실감 가득한 미국민에게 베이브 루스의 홈런은 희망이기도 했다. 베이브 루스의 홈런기록이 깨지질 않기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 아니었을까?
그런 신화들이 쌓인 메이저리그는 이제 역사마저 가진 거대한 규모의 시장이다. 양키스 경기가 있는 날에 전철을 타다 보면 양키스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양키스 경기 전용 방송국이 있는가 하면 각종 야구용품과 의류, 장난감, 액세서리 등이 양키스와 선수들의 이름으로 팔려나간다. 소비문화가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가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가진 크나큰 산업으로 발전해 있는 셈이다.
스포츠 산업은 결국 소비자들을 제대로 발산하게 하고 그 발산을 위한 제대로 된 감동을 줄 때 성장하는 모양이다. 거기다 이렇게 역사가 쌓인 경우에야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고교야구를 보러 동대문구장에 가 본 이후 야구경기장에 가보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양키스 구장에서 본 메이저리그는 전형적인 소비문화의 대명사이다. 이미 꿈과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구단과 선수들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팬이 어우러져 있는 한 쉽게 저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