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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내 취미를 밝힐 기회가 있으면 서슴없이 여행이라고 한다. 역마살 때문인지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탓인지 늘 떠나는 것을 즐긴다. 아파서 누워 있다가도 바람 쐬러 가자면 벌떡 일어난다.

유목민의 후예인가? 편안하게 정착하는 것보다는 늘 떠나길 원한다. 결혼해서 아이 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허락되면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여행이 된다. 이런 나의 방랑기는 28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8월, 고3때였다. 남들은 공부한다고 삼복더위에 머리 싸매고 비지땀 흘려가며 엉덩이에 땀띠 나게 공부에 정진하고 있을 때 이 철없는 소녀는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부모님은 공부를 하라고 채근하시지도 않았고 대학을 가라고 성화를 대시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얼른 졸업해서 생활전선에 나서라고 종용하지도 않는 그러저러한 나날이었다.

어찌 보면 전혀 부담 없는 생활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대략 고민은 해봤지만 그것을 위해서 악발이처럼 달라붙지도 집착하지도 않았다. 대학을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었던 것 같다.

그런 답답한 일생에서 벗어나는 뭔가 신선한 일탈을 생각했다. 부모님께는 친구 부모님이 휴가를 가셔서 친구네 집에 가서 공부하고 하룻밤 자고 온다고 둘러댔다. 자금은 학원비 받은 것으로 충당했다.

단과반 1과목에 4500원이었나 싶은데 영·수 2과목 신청한다고 깜찍한(?) 거짓말을 하고는 10000원 정도를 받아서 쓴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에다 내가 갖고 있던 돈 얼마 정도를 더 가져갔던 것 같다.

그 당시엔 비둘기호라는 기차가 있었다. 소위 말해 완행이라는 것. 모든 역마다 정차하는 제일 느린 기차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용산역에서 편도 4천 몇백원이었던 것 같다. 자고 오는 게 아닌 오후에 다시 밤차로 올라오는 여행이었다. 그러니 옷이고 뭐고 준비할 것이 딱히 없었다. 마음먹는 게 준비의 다였다.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게 얘기하고 간단하게 차리고 용산역으로 향했다.

많고 많은 여행지중 왜 하필 여수였을까?

왜 여수로 정했을까? 지금 스치는 생각으론 아마도 전라선이 제일 길기도 하고 왠지 호남쪽이 땡겼던 것 같다. 충청권 아래로는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여수를 찍어서, 표를 한 장 사가지고 출발시간까지 기다렸다. 출발시간은 밤10시가 넘어서였던 듯싶다.

찌듯이 무더운 여름날 사람 많은 완행열차를 타고도 두려움도 없이, 기대반 호기심 반이었다. 기차안 사람들이 신기했다. 대충 끼어앉아 땀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 밖이 환해지고 갑자기 아줌마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놀랐다.

충청권을 지나면서 아침장을 나서는 사람들인 듯싶었다. 아줌마들은 짐을 한보따리씩 지고 들고 대야에 가득 실은 물건들로, 남도에 들어선 기차 안에는, 사람보다 짐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말이 빠르고 억양은 셌다. 그냥 얘기인데도 마치 싸우는 듯 느껴졌다.

기차 안에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는 학생들, 휴가를 맞아 귀향하는 일반인들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곁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줄 모르고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게 바깥구경을 별로 해보지 못한 여고생에겐 신기하기만 했다.

그 속에 그들의 요동치는 삶이 느껴졌다. 학교에서 이론으로 듣기만 하던 생활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생선이 살아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꾸밈도 없었다. 사람살이. 땀내 나는. 아마도 난 이때 이미 여행이 내 체질이라는걸 안 것이 나닐까 싶다. 중학교 다닐 때도 시장을 지나가면서 물건 구경하길 좋아했다.

기차 안에서 만난 마음씨 착한 아저씨의 안내로 여수구경과 오동도 구경까지 하루에 실컷 하고, 다시 저녁 열차를 타고 밤새워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간이 컸던 것 같다. 어디 감히 여고생이 혼자서 밤차 타고 여행을 다닐 생각을 했을까?

갔다 와서 친한 친구한테만 살짝 털어놨다가 야단만 맞았다. 기지배가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고. 어쨌든 무사히 여행은 마쳤고 가슴 속에 자신감으로 나만의 비밀로 남아서 내게 희망을 주었다. 언제든 여건만 주어지면 떠날 수 있다고!

사람은 늘 혼자이고 모든 것을 혼자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사건은 신선함이었고 그로 인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무사히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한동안 밤차는 내 여행의 도반이었다.

이제는 교통수단이 바뀌었다. 밤새워 느릿느릿 달리던 비둘기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부산까지 2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KTX가 생겼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생겨 표를 끊어서 사람이 오르내리는 계단에 신문지 깔고 냄새나는 화장실 앞에 서서 수다 떨 일은 없어졌지만 가끔은 한없이 느리기만 한 비둘기호가 그리워진다.

대전역에 내려서 가락국수를 먹으며 기차가 떠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불어터진 국수도 맛있게 먹던 그 시절.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 삶이 풍요로운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떠나는 여행 응모글


#철도#여행#여수#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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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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