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를 통한 국민의 알권리가 중요한가? 국익을 위한 정부정책의 비밀유지가 더 중요한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얘기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전해오는 요즘 뉴스다. 내용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기자실 폐쇄' '브리핑시스템 개선' 등의 기사 행간에서 위와 같은 맥락도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토픽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호주의 최신뉴스다. <선 헤럴드>의 마이클 하비 기자와 제럴드 맥마누스 기자가 '참전용사수당 삭감법안'을 정부의 허가 없이 사전에 보도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실형언도가 확실시 되고 있는 것.
언론사 사주들이 만든 '호주의 알 권리 연합'
두 기자를 구하기 위해서 호주 메이저 언론사 사주들이 나섰다. 신문판매와 시청률 경쟁을 잠시 접어두고, 정부한테 빼앗긴 언론의 자유를 되찾아오기 위해서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한편 언론의 자유가 없으면 표현의 자유도 위협당한다는 이유로 문학인들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지난 5월 10일, 호주 메이저 신문사와 방송사 사주들은 효율적인 캠페인을 펼치기 위해서'호주 알 권리 연합(Australia's Right to Know Coalition)'을 발족시켰다. 그들은 이어서 5월 24일, 호주 언론자유의 실태를 조사할 조사위원장으로 전직 NSW주 독립 부패방지위원회(ICAC) 위원장 출신의 아이런 모스를 위촉했다.
차제에 기자들의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정부당국에 의해 야금야금 빼앗긴 언론의 자유도 회복하자는 게 '호주 알권리 연합'의 설립목적이다. 또한 공공정보(public information in Australia)의 공개를 제한하는 500개가 넘는 법적 금지조항의 법률적 타당성도 조사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디어&예술 동맹'의 크리스 워런 사무총장은 "그동안 정보자유 조항 (Freedom of information Act)을 갖고 정부와 대법원이 쓸데없이 까다롭게 굴었다"면서 "언론자유의 최대 위기는 기자가 비밀정보를 제공하는 취재원을 보호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필립 러독 법무장관은 "이번 싸움은 현존하는 법률과 윤리적 의무의 사이의 갈등"이라고 분서하면서 "기자들은 취재원을 보호하느냐, 아니면 법정모독의 죄목으로 감옥에 가느냐를 놓고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언론과 정부기관의 취재전쟁
<시드니모닝헤럴드>의 모회사인 페어팩스 그룹의 데이비드 커크 회장은 "대부분의 호주 국민은 정부가 무슨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얼마나 큰 해악이 발생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2007년 현재, 기자들이 보도하고 싶은 1000개 이상의 기삿거리가 법원으로부터 금지명령을 받은 상태다, 10년 전에 100여건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국민의 알권리가 얼마나 크게 침해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커크 회장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사례를 라이벌 언론사들인 페어팩스 그룹과 뉴스 리미티드 그룹에서 함께 내놓았다. 뉴스 리미티드 관계자는 "과거엔 언론사들이 각자 정부를 상대로 싸웠지만 지금은 연대해서 싸운다"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폭로했다.
① 정치인들이 지출하는 비용을 체크하고 싶어도 감사보고서를 얻을 수가 없다. ② 시드니에 소재하는 어느 식당들이 위생검사에 실패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③ 호주의 어느 학교가 '왕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자료를 주지 않는다. ④ 어느 술집에서 알코올 관련 범죄가 발생하는지 확인을 거부한다.
누가보아도 위의 내용들은 일반국민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사안들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정부의 비밀보장정책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줄다리기.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헤럴드 선> 기자들의 재판사태가 발생했다.
두 기자는 '정부가 참전용사들의 연금을 삭감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부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들은 감옥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내부고발자 이름을 판사에게 알려줄 수 없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호주 현행법은 기사의 소스를 판사에게 밝혀야할 의무가 기자한테 있다.
호주의 메이저 언론사들 똘똘 뭉쳐
지난 5월 10일 오전, 시드니에서 열린 언론회의에 참석한 메이저 언론사 사주와 간부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버거운 상대인 존 하워드 정부를 향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들이 선언한 다짐이다.
"국제사회에서 평가하는 호주 언론의 자유 순위가 보스니아·불가리아·볼리비아보다 낮은 35위라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민주정부에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가? 우리는 지금부터 국민의 알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강력하게 싸울 것을 선언 한다"
언론사 사주들뿐만 아니라, 호주 언론계 종사자들 모두는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06년 언론의 자유 순위에서 호주가 같은 영연방국가들인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보다 훨씬 낮은 35위에 랭크된 것 때문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뉴질랜드는 기자들을 믿는데 왜 호주는 믿지 못하는가"라고 투덜거리면서 "존 하워드 정부가 집권한 호주는 2등급 민주국가"라고 비아냥거렸다. 또한 '경량급 민주주의(lightweight democracy)'라는 신조어까지 사용하면서 "일반국민들은 호주정부가 무엇을 하는지, 정의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호주의 2006년 순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2003년 50위, 2004년 41위였다. 한국은 168개 국가 중에서 31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호주정부와 언론이 한국의 낙후된 언론자유 실태를 우려했던 걸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루퍼트 머독 소유 언론들이 가장 적극적
당일 회의에 참석한 언론사 사주 또는 간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호주 메이저 언론의 간부들이 총망라됐다. 국영언론과 상업언론, 신문과 방송, 회사의 규모, 중앙과 지방의 구분도 없다.
호주국영방송 'ABC' <시드니모닝헤럴드>를 발행하는 페어팩스 그룹, 호주 유일의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과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데일리텔레그래프>와 스카이TV를 소유한 뉴스 리미티드 그룹, 최고시청률을 다투는 <채널7>과 <채널9>, 이민자특별방송인 SBS-TV 등.
특히 영국·미국 등에서 보수정부를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의 뉴스 리미트 그룹 존 하티건 회장 겸 CEO가 간사 격으로 회의를 주제하면서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존 하워드 총리와 루퍼트 머독은 수십 년 지기다. 마가레트 대처 전 영국총리와 조지 부시 대통령만큼이나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동지(?)다. 그런 머독이 하워드 총리와의 밀월관계를 끝내겠다고 선언한 것. 거기에다 호주 문학인들이 하워드 총리 공격의 대열에 가세했다.
문학인도 꼬집는 '언론의 자유' 문제
데이비드 마 <시드니모닝헤럴드> 논설위원(작가)은 5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 2006년 시드니작가축제의 주제발표자로 참가해서 존 하워드 총리를 신랄하게 공박했다.
그는 "민주주의 심장(의회)에 대화의 경연장이 있다, 또한 민주주의 음색은 국민과 지도자들의 대화로 조율된다"는 등의 문학적 표현으로 연선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호주국영 ABC-TV의 '미디어 워치'를 진행한 미디어비평가답게 곧바로 독설로 연설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격정토로'였다.
"1996년 이래, 그는 자기를 비평하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은폐하기 위해서 언론을 옥죄고, 특히 국영방송인 ABC를 겁먹게 만들고, 과학자들이 떠들어대지 못하게 하고, NGO단체(비정부 기구)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는 호주의 행정수도 캔버라의 관리들을 (정보 측면에서) 생식불능으로 만들고, 의사당 업무를 꼬치꼬치 따져서 축소시키고, 예술작품을 검열했으며, 도서출판을 금지하는가 하면, 정부 안의 내부고발자를 고소해서 범죄자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소속정당이 법의 질서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댄다. 그러나 그는 국민들이 느낀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없도록 만든다. 또한 정치적 정의를 우롱하고 얻은 승리를 교묘한 언술로 미화시키는 정치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아니다. 놀랍게도 11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는 존 하워드 호주 총리다.
한편 6월 3일, 역시 시드니작가축제에 주제발표자로 참가한 호주의 대표적인 소설가 프랭크 무어하우스와 사라 매디슨 NSW대학교 교수도 "존 하워드 총리는 반칙과 단기전에 능한 선거전문가"라면서 하워드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특히 호주의 대표적인 역사소설 <거대한 날들>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어두운 궁전>을 집필한 프랭크 무어하우스는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면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도 힘을 잃게 된다. 예술가들이 하워드 총리의 간교함을 비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9월에 나올 '언론의 자유' 실태보고서
'호주 알권리 연합'이 조사위원장으로 위촉한 아이런 모스는 6월초 TV에 출연해서 "나는 호주언론의 자유가 35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솔직히 우리는 호주가 최상급의 민주국가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이를 방치하면 상태는 더욱 나빠질 것"이라면서 "만약에 호주국민이 객관적인 사실을 모른다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가 이런 발언을 한 이유는 오늘 10월 초에 총선이 실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일정이 빡빡하지만 오는 9월까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현대국가의 간접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일반 시민은 선거로 모든 걸 표현한다. 언론의 자유는 그들의 올바른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