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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의 군부권력이 깨달은 것은 '군대만으로는 국민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군대는 결국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군대를 먹이는 것도 군량미가 아니라 결국 국민 세금인데,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을 억압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군부권력이 새롭게 시도한 것은 소위 '이벤트 정치'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갖가지 이벤트를 만들어서 국민의 관심을 아예 정치로부터 떼어놓는 접근법이었다. 국민의 정치참여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국민의 정치이탈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접근법에 따라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9년부터 군부권력은 제24회 올림픽 개최를 추진하여, 1981년 9월 30일 서독(현재의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게 되었다. "쎄울! 꼬레아!"는 군부권력의 작품이었다.
또한 프로야구(1982년), 민속씨름(1983년), 프로축구(1983년) 출범 역시, 군부권력이 국민의 관심을 스포츠로 돌리고 있던 시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물론 운동선수들이나 스포츠 관계자들은 선의의 스포츠 정신으로 팬들에게 봉사했지만, 그 배후에는 건전한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를 계승한 전두환 집단은 1980년대 내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호소하는 일대 캠페인을 벌였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지 못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이 그들은 요란법석을 떨었다.
한편, 전두환 군부권력이 서울 여의도에서 대대적으로 연 '국풍 81' 축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80년대의 군부권력은 온갖 축제들로 국민을 '헷갈리게' 하고 그런 틈에 권력을 연장하려 했다.
군부권력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을 위협했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은 뒤에 서울 곳곳에서는 군인들이 길 가는 시민들을 붙잡고는 '무료 이발'을 해주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장발족 단속이었다. 총 대신 가위를 잡은 군인들이 이용사들의 영업을 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시에 군대를 이동시키려면 미군 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는데, 그 군인들은 오로지 한국군 사령관의 작전통제만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이와 같이 전두환 군부권력은 한쪽으로는 스포츠 열기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또 한쪽으로는 물리적 위협이라는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군부권력이 조장한 이러한 '관제 열기'는 한국민의 강렬한 민주화 욕구를 억누르는 데에는 별다른 효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임기가 끝나는 1988년까지 권력을 무사히 지키기 위해 86 아시안게임 및 88 올림픽 홍보운동을 열심히 벌였지만, 한국 민중의 분노는 끝내 전두환의 기대를 깨고 말았다.
군부권력이 80년대 내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목표를 내걸고 국민들을 관제 열기로 통제하려 한 데 반해, 국민들은 80년대 내내 민주화 쟁취라는 목표를 내걸고 '사제(私製) 열기'로 군부권력에 용감히 대항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제 열기가 관제 열기를 압도하고 말았다.
86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1년 전인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집권 민정당이 35.2%의 저조한 득표율로 간신히 1위를 지켰으며, 야당인 신민당이 29.3%의 득표율로 군부권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군부권력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열기로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오히려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군부권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군부권력을 놀라게 만드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8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시위가 더욱 거세졌으며, 그 열기는 6월 10일 절정에 오르게 되었다. 6월 29일 군부권력은 항복선언서를 낭독하고 말았다.
12대 총선 결과와 6월 항쟁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열기로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던 군부권력을 무색케 한 사건이었다. 군부권력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김새는 일'이었다.
이는 80년대 내내 군부권력이 추진한 '이벤트 정치'가 국민의 환심을 사는 데에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제 열기와 독재 연장을 지향하는 관제 열기라는 두 열기의 대결에서, 끝내 국민의 사제 열기가 승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87년 6월 항쟁의 의의는 바로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독재권력이 온 나라를 스포츠 열기로 마비시키면서 물리적 압박을 가하는 상황 하에서도 한국민들은 끝내 독재권력에 맞서 충격적인 레드카드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6월 항쟁의 의의를 말하면서도 한국인들 스스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온 국민이 일어난 그 6월에 중간계층을 대표하는 넥타이 부대는 물론 택시 운전사들까지 나서서 경적을 울려댔지만, 6월의 승리는 절반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198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0년에는 민주화세력 중 일부가 3당 야합을 통해 노태우의 옆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계승한 수구세력이 아직도 한국사회의 경제권력 등을 장악한 채 정상적인 사회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그럼, 6월의 한계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피플파워는 곧바로 정권교체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은 왜 번번이 절반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일까?
6월항쟁이 절반의 승리로 끝난 것은 애초부터 '절반의 적'만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이다. 절반과 나머지 절반을 모두 상대하고 또 양쪽을 모두 꺾었다면, 6월항쟁은 절반의 승리가 아닌 '온전한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민들은 절반의 적만 상대하느라 나머지 절반의 적을 알아채지 못했으며, 고사 직전에 처한 '절반의 적'은 멀쩡하게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의 도움에 힘입어 '3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럼, 6월항쟁 때에 한국인들이 간과한 그 '나머지 절반의 적'이란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미국이다.
4월혁명과 6월항쟁에서 잘 드러난 바와 같이, 한국의 독재권력은 단독으로는 민중의 저항을 억누를 수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머지 절반'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재권력은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적·경제적으로 한국의 독재권력을 지탱하고 후견해 주던 미국이라는 존재를 간과하는 것도 모자라서, 미국이 독재권력을 비판해 주기를 바라던 심리마저 6월 당시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6월항쟁에 앞장섰던 야당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민중이 미국에 도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6월항쟁 때에 군부권력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원위치'되고 만 것은, 저항세력이 군부권력의 후견인인 미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기에 고사 직전의 군부권력을 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6월항쟁은 분명 승리였지만, 그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절반의 승리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모순을 부채질하는 두 개의 적 중에서 하나의 적만 상대하고 또 다른 적은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월항쟁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6월항쟁을 계승하고 그때 못 이룬 승리를 마저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더 이상 배후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을 부채질하지 못하도록 당당하게 미국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또 과거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한미관계를 평등하고 합리적인 관계로 개선해야 한다. 또한 자유무역협정(FTA)과 전시작전통제권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으로부터 받을 것을 당당히 받아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뿌리(미국)는 그냥 두고 곁가지(수구세력)만 건드린다면, 한국사회의 개혁은 매번 '절반의 승리'로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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