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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를 탔다. 서울에 사는 손위 처남이 그림 전시회를 한다고 하기에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인데 KTX가 있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면 소요 시간 1시간 40분. 정말 좋아진 세상이다.
객차에 오르니 느낌이 좋았다. 깨끗하고 아늑한 공간.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꾸었다. 수년 전, 일본에서 '신간센'을 탄 적이 있었다. 무척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창 밖의 풍경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런데 KTX는 빠른 느낌이 없었다. 그래도 전광판의 속도계는 300km를 넘나들고 있었다. 탁자 위의 커피가 미동도 없다. 창 밖을 보지 않으면 빠르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열차를 한 시간 이상 타면 옆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40년 전, 그때는 그랬다. 옆자리의 낯선 사람과 음식을 나눠 먹고 대화도 주고 받으며 쉽게 친해지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아쉬움의 악수를 나누고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기차 풍경은 사뭇 다르다. 내 옆자리의 아가씨는 책만 열심히 읽을 뿐이다.
고요함 속에서 잠이라도 청해 보려고 몸을 젖히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한 줄기 추억이 비집고 들어온다. 33년 전이었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경북 문경이었다. 당시 문경에는 동차가 다니고 있었다. 비둘기호 보통 급행이라 했다. 두 칸짜리 객차. 문경에서 타면 점촌역에서 영주발 열차에 연결되어 대구까지 운행했다. 문경 사람들은 굽이굽이 산길이라 버스가 빨리 달리지 못하니 동차를 많이 이용했다.
고등학생 친구들, 왜 나는 몸을 숨겼을까
세월이 흐르면 아픈 기억이 더 크게 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직업병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나. 그 아픔은 하늘이 무너진 절망감이었다. 광산에 다니든가, 농사일에 뛰어들든가, 공사장을 전전해야 할 운명의 기로였다. 나는 대구를 동경했다. 큰 도시에 가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말은 나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가출을 했다. 가난에서의 탈출 시도였다. 그때 몸을 실었던 문경 발 동차. 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문경 산천을 보며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는지 모른다. 어린 마음에 금의환향하리라, 돈 많이 벌어 효도 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대구는 내 마음의 꿈동산이었다. 희망의 초원이었다.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2년만에 귀향을 했다. 대구에서 영주 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점촌에서 내려 문경 가는 두칸짜리 동차를 타야 했다. 그런데 동차 앞 칸에 친구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있는 친구들은 고등학교가 많은 점촌, 상주로 진학한 통학생들이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었다. 끌어안고 해후해야 할 친구들이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의 쌓인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나는 뒷칸에 탔다. 그리고 그들이 올까 봐 숨죽이고 있었다. 그들이 뒤로 몰려오면 화장실 칸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못 간 것이 죄가 아니건만 나는 그들 앞에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내가 너무 초라했다. 문경역에서 나는 그들이 다들 개찰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왁자하게 몰려가는 친구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집으로 향했다.
옥수수 입맛 다시던 아이야, 너는 지금 어디에
문경에서 도자기 공장에 다니며 독학할 때였다. 점촌에 서점이 많아서 동차를 자주 이용했다. 문경 사람들은 앞칸을 많이 이용했다. 그래야 아는 사람들끼리 같이 얘기도 나누고 심심치 않아 좋았다. 그때도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뒷칸을 즐겼다. 시끄러움 속의 조용함을 즐기는 버릇이 있었나 보다. 스물두살의 어느 날, 그날도 점촌에 갔다가 일찍 동차에 올라 자리에 깊숙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야! 문경에 있었나? 대학교 안 갔었나?"
눈을 떠보니 친구의 여동생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여동생의 친구이기도 한 그 애는 스무살짜리 아가씨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다가 집에 다니러 온다는데 활짝 핀 모습이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그 애는 새로 시작한 직장 얘기며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 자기 오빠 얘기를 쉼 없이 재잘거렸다. 조용히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 요즘 뭐하느냐고 묻고 내 여동생 안부까지 물어 와 나도 말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기차가 달리면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부끄러워하던 학업 중단도 그 애는 개의치 않았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함지박을 끌고 앞 칸에서 이동해 왔다. 비닐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데 금방 삶은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우리 가까이 오자 그 애는 옥수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가서는 옥수수 한번도 못 먹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우리 앞에 왔을 때 그 애는 옥수수를 만지면서 "맛있겠다"를 연발했다.
나는 애간장이 탔다. 하필이면 주머니에 잔돈밖에 없었다. 원래 풍족하지 못하던 시대에 용돈이 넉넉지 못한 나였다. 친구 여동생이, 여동생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옥수수가 먹고 싶다는데 사 줄 수가 없었다. 또 한번 내가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먹고 싶다 하지 않아도 오빠로서 사주면 기분이 좋을 텐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 애는 맛있겠다고 말만 하면서 자기도 살 생각을 안 했다. 사실 그 애가 샀으면, 그리고 같이 먹었으면 나는 더욱 체면이 구겨졌을 것이다.
결국 그 할머니는 함지박을 끌고 뒤 좌석으로 옥수수를 팔러 갔다. 그 애는 그 이후 만나지 못했다. 여동생을 통해 간간히 듣던 소식도 끊어진 지 오래다. 지금은 그 어디서 중년 여인이 되어 잘 살고 있겠지.
추억 속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열차가 서울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시간은 아직 아침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시회 구경하고 처남댁 식구들과 점심 먹고 내려가도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축지법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옛날, 도인들이 축지법을 쓰면 대구에서 서울까지 1시간 40분만에 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참으로 좋은 시대에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더 빨라지겠지만. 점점 좋아지는 세상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KTX가 백두산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부산 발 백두산 행 KTX를 타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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