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리에서 숙소인 장전항 해금강호텔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녹슨 철로가 분단의 세월을 상징하는 듯했다. 초소가 많은 만큼 보초를 서는 군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간혹 한둘은 여유있는 웃음으로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 손을 흔들어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남과 북의 분단의 세월이 가져온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의 체제에 대한 우월감으로 바라보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꼬마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자 혀를 쭉 내밀고 '메롱'으로 화답을 한다. 그 아이들은 금강산 관광객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정도로 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분단의 세월이 남기는 상처가 끔찍해 보인다.
비로봉이 보인다는 장전항, 숙소인 해금강호텔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붉지는 않지만 그 햇살과 그 별빛과 달빛들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식사 후 장전항 근처의 고성횟집에 들렀다. 아직 북한에서는 양식업이 발달하지 않아 완전 자연산만 취급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음식에 대해서 까탈스럽지도 않고 음식 맛도 잘 모르지만 고성횟집의 회맛은 그동안 접했던 자연산 회와는 달랐다. 더군다나 북한접대원들의 대접과 대화는 음식의 맛을 더해준다.
자연산 회에 대한 극찬을 하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회 맛이 참 좋습니다. 자연산이라서 그렇지요? 북한 여성동무들도 참 예쁘네요. 남남북녀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북한 여성동무들도 꾸미지 않은 자연산이네요" 했다.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대답이 있었다.
"남한에서는 사람에게도 자연산이라고 합네까? 자연미갔지요?"
맨 처음 금강산관광이 시작되었을 때에만 해도 경직되어서 피차간에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렇게 오고 가다 보니 서로에 대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이리라. 그렇게 오고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일의 발걸음이면 좋겠다.
북한접대원 동무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장전항을 걷는다. 바람은 잔잔하고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반짝거리며 빛난다. 저 별, 그래 남녘땅에서도 보던 그 별이다. 그 별과 달과 햇살과 바람과 공기, 같은 하늘 아래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그들은 물었다.
문익환 목사님을 아느냐고, 문규현 신부는, 임수경은 아느냐고. 문익환 목사님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두 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통일의 꽃'으로 그들을 기억했고, 그때 우리도 마음으로 하나였다고 하니 너무 반가워한다.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사는 날, 그것이 단지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날을 꿈꾸었던 문익환 목사님은 이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꿈은 남아있다. 더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꿈에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장전항에서 그 바다를 바라보면 고성횟집에서 북한접대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북녘땅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새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에 일어나 해금강호텔 맞은 편에 있는 금강산해수욕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물새소리, 바닷가 근처에 피어난 갯완두, 갯메꽃, 해당화, 도깨비사초, 조록싸리 등이 바람에 흔들린다.
눈에 많이 담아두자, 마음에 많이 담아두자. 저렇게 다르지 않은 꽃들 마음에 많이 담아주자. 그리고 통일, 그날이 오면 이 길을 다시 걸으며 가장 예쁜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을 담자고 했다. 지금 나에게는 그들을 한 컷 담는 것보다도 북녘땅을 한 걸음 더 걷는 것이 우선순위다.
여행길,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을 좋아했고 여전히 그런 걸음걸이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발자국 하나라도 더 남기고 싶어서. 산책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남한에서는 사람에게도 자연산이라고 합네까? 자연미갔지요?"라는 딱 부러지는 북한 접대원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여오는 듯하여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