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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왕조들은 주로 토지와 인민을 빼앗기 위해 상호 간에 전쟁을 벌였다. 왕조들이 토지와 인민에 관심을 가진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국부의 확보 때문이었다.
토지와 인간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농경경제 하에서는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인민을 모두 확보하지 않고서는 국부를 축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 경제는 더 이상 농업경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토지와 인민을 빼앗지 않고도 얼마든지 국부를 축적할 수 있다.
예컨대, 다른 나라의 핵심 금융기관을 불법적으로 획득하는 방법으로도 자국의 국부를 늘릴 수 있다. 전쟁 양상이 '군사전쟁'에서 '경제전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전쟁 양상이 바뀌는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정도의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군사전쟁에 비해 경제전쟁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신종 현상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전쟁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국부를 불법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똑같은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전쟁'을 경제적 '경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세계화에 따른 당연한 경제 현상으로 이해는 경향이 있다.
둘째, 군사전쟁은 주로 명백한 적대국가를 상대로 행해졌지만, 경제전쟁은 적대국가뿐만 아니라 우방국가를 상대로도 충분히 전개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방국들 간에 무역 등을 통한 경제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경제 교류를 가장한 경제전쟁에 대해서는 정부 당국자들까지도 그 위험성을 모르고 넘어가기가 쉽다.
셋째, 군사전쟁에 비해 경제전쟁은 그 시작과 끝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군사전쟁의 경우에는 시작할 때에는 선전포고를 하고 끝날 때에는 강화협정을 맺지만, 경제전쟁의 경우에는 은밀히 진행되기 때문에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를 분간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전쟁의 '패전국'은 자국이 패전국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경제전쟁은 정부당국까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핵심적 국부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놓는 기능을 하고 있다. 명백한 군사적 침략 같으면 군대라도 동원해서 저지해 보겠지만, 소리 소문 없이 전개되는 데다가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딱히 뾰족한 대응 수단을 강구하기도 어렵다.
"사람 죽이는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과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왕조들도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다. 다른 나라의 국부를 빼앗으려면 상대방 군인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무기를 든 것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상대방 나라의 국부를 빼앗을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보다 더 대규모의 국부를 손쉽게 빼앗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경제전쟁이 과거의 군사전쟁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교묘하게 상대방의 국부를 빼앗고도 단지 상대방 군인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전쟁은 군사전쟁보다도 훨씬 더 경계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난 2003년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등의 방법으로 외환은행 주식을 헐값에 인수한 론스타라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은 옛날로 치면 하나의 군단급 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이나 활 같은 재래식 무기가 아닌 '기업 인수·합병'이라는 신종 무기를 들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론스타라는 다국적 기업을 통해 한국의 국부가 '어디론가'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므로 이는 과거의 전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단지 군인들이 죽지 않았을 뿐이다.
외환은행 매각 건이 현재 1심 재판에 계속 중임에도 불구하고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10일 뉴욕 쉐라톤호텔에서 열린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법원 판결 이전에도 매각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한국 사법당국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도 론스타는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이 론스타의 불법행위를 과연 실효적으로 응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 하겠다.
물론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관계 국가의 법률이 허용하는 한도에서는 그것을 불법이라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합법적 절차를 거친 경우라면 경제전쟁을 운운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진 바와 같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으로 사들이는 과정에서는 분명 불법적 방법이 개입했다. 이는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 국경을 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국의 핵심 국부를 그런 불법적 방법으로 획득했으니, 이것은 분명 경제전쟁과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방을 자처하는 미국계 기업이 한국을 상대로 이런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한국인들로서는 더욱 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 사법당국이 론스타의 헐값 인수가 불법이라고 판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론스타를 단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라도 외환은행을 매각하고 한국을 떠나면 그만이다.
론스타 사건을 통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다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전쟁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소위 우방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군사전쟁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경제전쟁만큼은 얼마든지 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안보의 개념을 경제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둘째는 대규모 다국적 기업을 한국 진입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대개 본국의 정치적 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후에 그런 기업들을 상대로 단죄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별다른 제재 효과를 발휘하기는 힘들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단물'만 빼먹고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후약방문을 강구하기보다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진입과 기업인수 과정에서부터 한국 정부가 철저히 규제하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강대국의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사후 규제를 가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사전 대책을 강구하는 쪽이 보다 더 실질적인 대응이 될 것이다.
IMF 이후 한국 정부는 외자유치에만 주력한 나머지 '남의 돈'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 남의 돈에 독이 묻은 줄도 몰랐다. 그때의 어리석음이 오늘의 화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론스타에게 당한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면, 외국 자금을 덥석 받기보다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검증하기 위한 입법절차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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