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산과 물이 푸르고 맑으며, 인심 또한 순후하기로 유명하여 '삼청(三淸)의 고장'이라 이름 붙은 '청도(淸道)'. 그 이름과 너무나 어울리는 '맑음'을 간직한 고장 청도. 그곳으로 들어서는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청도역(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위치)이다. 청도역에서 나는 잊은 줄 알았던 추억과 마주했다.
#1. 추억
어머니의 고향이 청도였다. 가난한 형편에 그럴듯한 가족휴가를 한 번도 간 적 없던 우리 가족이 1년에 한 번 여름 휴가철마다 들른 곳이 바로 청도에 있는 외가였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운문사와 가까운 곳에 외가가 있었기에, 유명 휴양지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친구들에게도 운문사에 다녀왔노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매년 빼먹지 않고 외가로 우리를 데려가신 어머니도 이러한 사정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년에 한 번 기차를 타는 것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기차에 오르면 우선 어머니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오빠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대개 어머니는 2살 어린 내 편을 들어주셨고, 어머니 옆자리를 내게 빼앗기고 울먹이는 오빠를 위해서는 기차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소시지'를 사주시곤 하셨다.
매년 반복되던 이 여행에서 어느 날 오빠가 의젓한 웃음과 함께(싸움 없이도!) 어머니의 옆자리를 나에게 양보해 주었을 때, 나는 무언가 조금 서운한 기분을 느꼈던 것도 같다.
#2. 청도역
대도시의 광장과 같은 역사(驛舍)를 거쳐 기차에 올랐다가, 장난을 치고 졸기도 하다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기차에서 내리면, 탈 때 보았던 역사와는 너무나 다른 조그마하고 한적한 청도역을 만날 수 있었다.
기차에서 청도역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오래된 역 대합실이다.
햇볕을 막을 그늘 하나 없는 이 역에서 대합실은 기차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공간일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물론 장난을 치기에 유용한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대합실 창문에 뽀얗게 낀 먼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청도에서의 첫 번째 놀이였다. 창문에 내 손가락이 훑었던 자국이 남는 것과 동시에 내 손에도 까맣게 그 흔적이 남는 재미있는 놀이였는데, 보통 이 놀이는 어머니의 불호령과 함께 끝이 나곤 했었다.
계단을 거쳐 청도 역사(驛舍)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청도역만이 가진 멋진 공간이 있다.
청도역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수집한 '전통 민속자료'를 전시해 둔 공간이 바로 그것인데,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현대화에 열을 올리다가 서로 비슷해져 버린 요즘의 역들을 생각하면 그 공간의 소중함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또 청도의 도입이라 여겨지는 곳에 있는 전통자료들은 청도라는 고장을 '전통이 살아있는 곳'으로 기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어린 시절, 매년 들를 때마다 조금씩 그 수가 늘어가는 민속자료들을 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오빠와 내 손을 꼭 붙잡고는, 하나씩 짚어가며 그 물건들의 쓰임과 함께 어머니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곤 하셨다. 그런데 아쉽게도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오래된 사진처럼 어머니의 표정이 아련히 떠오를 뿐이다.
#3. 홀로 찾은 청도역
최근 거의 10년 만에 청도역에 내렸다. 동행 없이 홀로 이 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단 한 번 외가에 들르고는 발길을 끊었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다며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시던 외할머니가, 늘 웃어주셨던 그 할머니가 나를 보며 서럽게 우시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 힘이 들었던 까닭이다. 미안하다고만 말씀하시는, 그 서러운 울음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할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 기차에 올랐다. 내가 가지 않은 그동안 청도는 소싸움 등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기에 많이 변했으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너무나 많았고, 잊은 줄 알았던 많은 기억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오래된 대합실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울었다. 병든 노모의 곁을 지키지도 못하는 돌아가신 어미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고, 나 자신의 아픔밖에 볼 수 없었던 내 지난날의 이기심을 반성했다. 또한 그 아련한 시간들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이 못내 서러웠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직 너무 어린 나를 두고 무책임하게 떠나신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효도 한 번 할 수 없게 서둘러 떠나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죄책감도 느꼈다.
이번에 홀로 청도로 오는 기차 안에서는, 내가 좀 더 자리 잡고 성공하기 전에 할머니가 떠나실까 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어머니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할머니께 다 하겠노라는 어설픈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한참을 울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그때까지 모든 것을 미뤄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 했던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무언가를 해야 함을 새롭게 깨달으며,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는 힘겹게 청도역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