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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공기가 막 기세를 떨치려 준비 중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대비해야 할 시기였다. 그 흉흉한 바람은 이미 캠퍼스에도 불어 많은 이들이 기말고사를 위해 도서관의 후끈한 열기나 포근한 집안의 방을 향해 저마다 발길을 옮기는 와중이었다.
11월 18일, 캠퍼스를 박차고 나와 청량리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2장 끊었다. 갑작스레 그랬거나 홧김에 구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겨우살이를 위한 출발의 경적소리였고 계절에 반항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경직됨이 계절만큼이야 되진 않지만 학내 영자 신문사에서 만난 사이란 좀처럼 그 긴장감이 쉽게 누그러질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게다가 선배 후배 사이의 호칭은 언제나 '형'이었다. 유래는 예전 어느 시절 '학형'이 선 후배 사이에 통용되었던 것이 준말로 '형'을 쓰게 된 것이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호칭은 서로 간의 거리유지에 톡톡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용기 내어 먼저 기차표라도 내미는 것은 그 안에서 ‘스캔들’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온 계절이 떠나가도록 회자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이야 사무실 벽쯤 우습게 넘어다니고 콘크리트 벽마저 뚫어 인연의 끈이 단단할수록 냉랭한 공간을 훈훈하게 덥혀주는 법이다. 누가 먼저 기차표를 내미느냐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싹이 움트고 자람이 시작됐음을 저마다 선포할 일이 남은 것이다. 그래서 그 날 자정 쯤의 출발은 그토록 설렜을 것이다. 6시간 가까이 걸려 정동진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밤보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어둠이 가시려면 몇 시간 남아 보여 둘은 매운탕을 시켰다.
처음으로 하는 ‘공식적’ 식사였다. 적당한 피곤함이 분별없는 마음을 녹이는 와중에, 저 멀리 새벽 어스름 사이로 불그스레한 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뛰쳐나와 백사장에 저마다 준비해놓듯이 삼각대를 펴고 카메라를 설치하는데 삼각대는 고장이 나 다리가 한쪽이 뽑혀버렸다. 고요히 세상에 아침을 알려주는 줄 알았던 그 태양은 촉각을 다투며 빠르게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둘은 멀리 온 기념으로 대충 사진이라도 찍으려는데 그만 선배란 녀석은 타이머를 설정하는 법을 까먹은 것이다. 후배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더니 신기하게 맞춰놓고 적당히 자리를 잡아 포즈를 취한다.
급하게 얼렁뚱땅 취한 포즈지만 이미 둘은 연인처럼 모든 것을 감추고 태양을 맞이하였다. 해가 뜨는 감동적 순간은 등 뒤로 한 채 순식간에 하루아침이 밝았다. 첫 여행, 일출 등 처음이라는 생생한 느낌은 생각보다 허무한 것이었다. 둘은 허무함을 달래려 정동진 주변을 걸었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해변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변은 그저 해변의 어느 도시에 불과한 느낌이었다. 콘크리트 가루와 모래가 적당히 섞인 주차장에 앉아 둘은 미래를 향하는 대화를 한다.
"저도 형 사랑하죠"
남이 들으면 어색하기 그지 없고 게다가 요상한 느낌마저 드는 말이지만, 적어도 그 선배는 감동의 파도가 가슴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와중에 따스함이 선배-후배의 긴장감을 헤집고 들어와 이내 녹여버린다.
11월 19일 오전 9시 15분, 정동진을 떠나 청량리로 행하는 열차안은 정동진을 떠나오던 그 느낌과 사뭇 다르다. 선배는 고단한 후배의 잠을 위해 한쪽 어깨가 무겁지만 그마저 편안하고 귀에 꽂은 노래들은 어느새 가사가 마음에 들어온다.
6시간 여의 긴 여정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선배의 머리엔 좀 전에 나누었던 진심어린 대화와 정동진에서 밀려오던 파도처럼 다가왔던 ‘처음’의 생생함이 오버랩된다.
철길을 달리는 기차가 흔들거린다. 눈앞에 보이는 철길은 직선이지만 사실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철길은 없다. 그리고 절대 한쪽 철도만 깔려있는 곳도 없다. 언제나 둘이 함께 나아져 있고 둘은 직선이든 곡선이든 평행을 유지한다.
둘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평등하되,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첫 여행이지만 그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유일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 기차여행의 묘미를 몸이 기억하지만 굳이 의식이 몸을시키지 않는다. 물론 핑계지만 아직 몸은 기억한다. 교통체증이 없고 정거장에서 잠시 승객을 태우는 것 외에는 지체될 이유도 없다. 탈선이나 충돌의 극단적 사고 가능성이 극명히 낮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요즘 들어 요런 몫 좋은 '독점산업'에 무슨 바람이 불어 역무원도 줄고 승무원도 대폭 줄고 간이역 수는 늘어만 가고 하지만 아직은 나라가 운영하는 탓에 멕시코의 철길 마냥 뚝뚝 끊기지는 않았으니 아직은 한동안 마음 놓고 탈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런 생생한 기억과 추억을 실어나르는 보고를 어느 누구나 똑같이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첫 여행의 설렘쯤 곱씹고 다시 한번 찾게 되었으면 한다. 설렘의 기억이, 따스함의 온기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 적자산업이다라는 타령을 물리쳐 우리 모두의 것으로 머물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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