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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의 안흥내항
저물녘의 안흥내항 ⓒ 강곤
볕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들판과 아스팔트를 내리쬐던 봄날 오후. 태안읍에서 출발해서 603번 국도를 타고 근흥면을 지나 20여 분 쯤 달리면 신진도로 향하는 다리가 나오고, 그 아랫길로 비스듬히 들어서면 안흥 내항이 나온다.

태안의 옛 길을 찾아 나선 김영규 선생(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안흥 내항 구 나루터 자리에 서자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이라고 못 박듯이 말한다. 태안의 길이 끝난 자리, 아니 땅 길이 바닷길과 한때 행복하게 만났던 자리. 새로 들어선 신진항(안흥 외항)에 밀려 이제는 드문드문 낚시꾼들이나 찾는 안흥 내항에서 태안의 옛길 찾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때 무역 중심지로 빛났던 내항

안흥 내항에서 중국 산둥반도까지의 거리는 불과 360km. 태안에서 부산가는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보니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류하던 곳이고 고려시대 몽고와의 무역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내항 구 나루터는 바로 중국 사신의 배가 닿고 떠나던 지점이었으며 거기서 올려다 보이는 후망봉은 두 나라 사신들이 뱃길을 나서기 전에 무사 귀환을 비는 제(祭)가 열리던 자리였다.

안흥 출신으로 태안군 4대 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김성진씨는 "해방 후 내항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기름을 중국에 파는 밀무역이 성행했다"고 귀띔한다. 70년대 안흥 앞바다에 꽃게와 피조개 잡이가 한창일 무렵에는 일본 제품들이 흘러들기도 했다. 불과 30~40년 전 내항은 일본으로 해산물을 수출하는 중심지로 군산, 인천과 함께 서해안 3항으로 꼽혔다. 그러나 1993년 신진대교가 신진도와 육지를 잇게 되고, 신진도에 신진항(안흥 외항)이 들어서게 되자 내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1년부터 해양수산부가 추진한 안흥 내항 정비공사가 계획대로라면 올해 마무리가 될 것이나, 아직 주차장터가 확보된 것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변화의 조짐을 찾기 힘들어 보였다.

김영규 선생과 답사한 다음 날, 다시 내항을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문을 연 집이 드물어 여기저기 어슬렁대다 아침 겸 점심으로 해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찾아간 곳은 노인정이었다. 여기도 이른 시간인지 인기척이 없다. '할머니 방'이란 팻말을 단 미닫이문을 슬쩍 여니 할매 하나가 화투패를 맞추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목욕을 가셨단다. 할매와 마주앉아 말동무를 하다가 만난 이가 1964년 순경으로 안흥에 와서 40여년을 넘게 살고 있는 이해선 할아버지다.

순경에서 지서장까지, 안흥에서 보낸 40여년

그의 고향은 충남 온양이다. 순경이 된 것이 그가 스물여섯 되던 해인 1961년. 그가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온 까닭은 다름 아닌 살림살이 때문이었다.

"58년도 12월에 제대를 했거던. 뭘 할까 했는데, 59년도 9월에 경찰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을 해 경찰이 됐지."

하지만 많지 않은 순경 봉급으로는 돈을 도무지 모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제일 먼저 직장을 잡았어. 그러니께 친구들 중에 돈 버는 이가 나밖에 없었지. 만날 밥을 먹거나 다방가거나 술을 먹거나 다 내가 사야 하는 거여. 그땐 다 외상이었거든. 다방 가도 외상, 이발소도 외상, 술집 가도 외상. 봉급을 받으면 오히려 집에서 다달이 500원인가 1000원인가를 보태야 되는 거여. 10원도 못 모아. 긍께 안 되겄더라고."

서른 해 넘게 안흥을 지킨 순경, 이해선 할아버지
서른 해 넘게 안흥을 지킨 순경, 이해선 할아버지 ⓒ 강곤
그는 일단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해안 경비정을 타면 항해수당에 이것저것 붙어서 봉급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일이 수월히 풀리지 않았다.

"경찰 동기가 담당자였는데 경비정 타려면 해상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여. 그래서 한 3년 있다고 혀, 했는데 경상도나 전라도, 강원도에서 지원한 것들이 죄다 경력을 10년씩 붙여서 지원을 해놓은 거여."

안 되겠구나 싶던 차에 마침 서산에서 근무하던 경찰 한 명이 온양으로 지원을 하게 되어 그와 맞바꾸는 형태로 64년 드디어 서산 경찰서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태안 안흥지서로 오게 되었다.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나 길은 있다"

"당시엔 완행버스밖에 없었어. 온양에서 아침에 출발했는데 여기에 오니까 저녁이여. 한 아홉 시간 걸렸나. 요 밑이 버스 종점이었는디, 버스에서 내리니 달이 훤하게 떠서 비추는데 지서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더라고. 그렇게 혀서 여기 생활을 시작했지. 그땐 재미난 게 온양에서 열차를 타고 홍성역에 내리면 거기서 태안 가는 버스를 대놨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막 뜀박질을 해서 버스로 가야 혀. 안 그러면 서산까지 콩나물 버스에 서서 와야 하닝께. 창문 열고 올라타는 사람, 창문에 짐 밀어 넣고 자리 맡아달라는 사람…."

안흥에서의 순경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움이었고 즐거움이었다고 그는 추억한다.

"못 보던 바다를 보고 배타고 그러니까 재미나더라고. 해상경비는 해안 순찰 돌고 불법으로 고기 잡는 거 감시하는 일이지. 바다에도 다 길이 있어. 없는 거 같아? 도로에도 차선이 있고 차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듯이 배가 암초가 있는 데로 가면 큰일 나지. 등대가 뭐여? 길 알려주는 거 아녀. 인천서 배가 나오면 영도가 있고 다음에 팔미도가 있어. 팔미도만 보고 나오면 영흥에 등대가 또 있어. 거기서 다시 옹도가 보인다고. 바닷사람들은 누구나 캄캄한 밤이라도 등대 불빛 신호를 보고 거기가 어딘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있지."

하지만 다 아는 좁은 동네에서 불법을 단속하는 일이 마냥 쉬웠을 리는 없다.

"고기잡이 하려면 허가가 있어야 혀. 아무 데서나 잡으면 안 돼지. 큰 배는 깊은 바다에서 잡고, 작은 배들은 얕은 바다에서 잡아야 하거던. 큰 배가 저인망으로 얕은 데서 막 잡으면 서민들, 작은 배들은 피해가 크지. 그런 거 감시하는 거야. 물론 처음에는 이러면 안 된다, 하고 몇 번 계도를 하지. 하지만 계속 하면 어쩔 수 없어. 어떤 사람은 벌금 내고도 또 한다는 사람도 있어. 벌금 내는 거보다 수익이 더 나니께. 육지도 어려운 사람이 많지만 바다에도 많았어. 육지도 나쁜 사람 있고 바다에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볼 때 바다사람이 더 순박해. 그런 거 같아."

순박한 바다, 그러나 벽지에서의 살림살이

"배를 타고 나갈 때는 막소주 대병짜리로 대여섯 병을 꼭 싣고 나가요. 섬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술이여. 혼자 고기잡이하는 사람 만나 한 잔 주면 좋아하지. 왜 이런 힘든 일 하느냐고 하면 아이들 주렁주렁 있는데 벌어먹고 살 게 이것밖에 더 있느냐고, 그렇게 해서 친해지면 나중에 반찬 하라고 잡은 고기도 몇 마리 주고. 해안순찰 끝나고 돌아오면 절대 집으로 곧장 안 가요. 동료랑 딱 가는 막걸리집이 정해져 있지. 가서 주전자에 막걸리 한 말, 두부에 김치 놓고 얼큰하게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때 생각이 제일 많이 나."

그는 이듬해 이미 약혼해서 온양에 있던 집사람을 데리고 와 본격적인 살림을 시작했다. 항해수당에 특근비, 급식비까지 더해져 서장 월급보다 많이 받던 시절이었지만 온양에 줄줄이 달린 동생들 챙기느라 늘 빠듯한 형편이었다.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 중학교, 농업전문고등학교까지 다 내가 뒷바라지해서 나왔어. 봉급이 나오면 홀딱 부쳐주고 그러니까 안식구가 참 힘들었지. 긍께 한 번은 태안을 나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디야, 그래서 요 윗집에 꿔달라고 했더니 안 꿔주더래. 그때가 가장 서러웠단 얘기를 저번에 하더라고. 형편이 어려우니께 안식구가 여인숙을 했었어. 그게 일이 고되거든. 방 청소 다 해야지, 밤이면 그때는 전깃불이 있나 뭐가 있나 호롱불 밝혀야지. 그러면 시커먼 그을음 생겨서 지워야지. 세탁기도 없으니 다 손빨래 해줘야지. 늦잠 한 번 자보는 게 소원이라 했응께."

비단 고생이 그 집뿐이었겠는가. 60,70년대의 가난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기는 진짜 벽지였어. 차도 한두 대 들어왔을까. 먹는 물이 없어서 나룻배 타고 저 건너 신진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지. 빨래도 저 건너로 이고 가서 했어. 텔레비도 없을 때였고. 당시에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 있었거던. 재밌는 연속극 할 때는 다들 물통만 줄맞춰놓고 연속극 들으러 가는 거야. 그때 살짝 가서 받아오곤 했어. 아니면 저기 (안흥진) 성안마을에 가서 길어 와야 했는데 길이 안 좋아서 갔다 오면 물통에 물이 반밖에 없어. 그러다 천주교 성당에 외국인 신부님이 2만원인가를 도와줘서 동네에 우물을 팠는데 마실 물은 안 돼도 물이 나와서 그때부터는 빨래는 여기서 했지.

그때 나룻배는 털보 할아버지가 했는데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 또 하다가 그이마저 죽고, 다리 생기고 난 뒤에 없어졌지. 그때는 모조라고 한 번 탈 때마다 삯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치를 한 번에 줬지. 60년대 말인가, 당진에서 방파제 막을 때 우리가 가서 경비를 해줬거든. 그러니까 거기서 밀가루를 큰 푸대로 하나를 주드라고. 그런데 저 밑에 집 아들이 못 먹어서 퉁퉁 부어 있는 거여. 곧 죽을 거 같다고 그러드라고. 그래서 밀가루를 푸대째 그 집에 줬지. 그 동생이 지금도 여기 사는데 그때 정말 고마웠다, 지금도 그 얘기를 해. 그만큼 살기 어려웠지. 배 있는 사람도 두세 집 밖에 없고 다 남의 배 타는 사람들이었거든."

안흥 내항의 마지막 봄날

60년대 말, 70년대가 되어 일본 수출길이 열리면서 안흥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처음엔 꽃게잡이, 그 다음에는 삼치바리(삼치 잡이) 그리고 피조개, 이런 순서로 수출을 했어. 당시에 다방만 해도 이 좁은 데서 네다섯 개가 됐고 술집도 꽤 많았지. 술집 아가씨만 해도 100명은 넘었을 거야. 아침에는 얘들이 눈비비고 나와서 길바닥에 돈 주우러 다녔다니까.

밤새 술 먹고 주머니에 넣다가 흘린 돈들이 여기 저기 있었으니까. 읍내에서도 안흥에서 배 타는 사람이다 하면 다 외상 줬어. 선원들은 돈 안 내고 밤새 술 먹고 술집에서 그냥 자요. 그러면 일손이 귀했으니까, 아침에 배 탈 사람이 없어서 배가 못 떠나요. 마음 급한 선주들이 읍내까지 차갖고 와서 술값 치르고 선원들 싣고 가고 그랬지."

그러나 양식업이 발달하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양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안흥량의 어획량이 줄어들자 내항은 곧 쇠락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영향은 신진대교 건설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많이 잡다보니 양이 떨어졌겠지. 예전에는 이 나루터 앞에도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지금은 두 시간 정도는 배 타고 나가야 고기가 좀 잡히거든. 그때부터 낚시하는 사람들이나 가끔 오곤 했지. 그래도 유람선 타러, 수족관 보러 사람들이 꽤 왔어. 그러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유람선 타는 사람도 다 신진항으로 가고 낚시꾼들도 없어졌지."

안흥내항 구 나룻터 자리. 건너편에 신진도로 가는 다리가 보인다.
안흥내항 구 나룻터 자리. 건너편에 신진도로 가는 다리가 보인다. ⓒ 강곤
반평생 살며 일하던 안흥지서가 문을 닫은 것은 그가 정년퇴임을 하기 1~2년 전인 96년 무렵이었다. IMF를 맞아 구조조정의 된서리가 공직사회를 흔들 당시였다.

"지서 없앤 일은 잘못했어. 구조조정은 필요 없는 사람들 줄여야 하는 것인디 그러면 경찰서장이나 책상에 앉아 있는 윗사람들 줄여야지. 열심히 일하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오히려 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녀? 신고하면 나 혼자밖에 없어서 못 나갑니다, 그러면 누가 책임질 거여. 필요 없이 있는 사람들, 봉급만 타먹는 사람들 줄이고 밑에서 주민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있는 말단 경찰관을 더 늘여야 된다는 얘기여."

사람들 마음 속의 길 찾기

그는 97년 은퇴를 해서 이제 10년 째 노후를 이곳 안흥에서 보내고 있다. 30년을 넘게 내항에 남아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70년댄가, 경찰 동기인 친구의 삼촌이 치안본부장이 됐잖여. 그때야 치안본부장이면 다 자기 맘대루지 뭐. 우리 동기들이 다 서울로 발령받아서 오토바이, 사이카 타고 그랬어. 그리도 지금 보면 다 애로가 있더라고. 난 후회 없어. 경찰이 남들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하고 싫은 소리 하는 직업이잖아. 그래서 인심 잃고 떠나는 사람도 많아.

태안, 서산에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걔네들 얘기 들어보면 편치 않지. 술자리 가도 흘깃흘깃 보고 그런다는 거여. 지가 꾸리고 뒤가 켕기니께 그런 게지. 나도 잘못한 일이야 왜 없겠어. 여기가 한창일 때 상사(商社)들이 많았어. 나는 그 사람들 상대했지, 여기 주민들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했고 밥 한 번 사달란 이야기 안 했어. 상사들은 다 저울로 장난치고 그랬거든. 그러니 우리에게 잘 보여야지. 그래도 나는 크게 잘못 한 거 없고 인심 잃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사니 얼마나 좋아."

얼마 전 그는 부인과 차를 타고 창리에서 점심 먹고는 예정에도 없이 지리산으로 남원으로 해서 여수까지 여행을 갔다 왔다고 했다.

"여수에 집사람이 돈 빌려줬다가 못 받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구경 갔다가 들렀지. 그런데 갔더니 돈을 받기는커녕 도와줘야 할 형편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냥 왔어. 집사람이 가만 있었느냐고? 아니 집사람이 빌려 줬는 걸. 내가 그러라 그랬나?"

이 욕심 없는 노부부를 보며 사람은 살아가는 곳을 닮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안흥 내항을 살리기 위해 발전방안이 나오고 그에 맞춰 길을 낸다고도 하고 신진도로 꽃다리를 놓는다고도 한다.

길을 새로 내는 것도, 신진항과 차별성을 갖추고 내항의 특성화를 찾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다만 무엇보다 이런 일들이 안흥에서 살아왔고 또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 속 길을 헤아리고 찾아갈 때 진정한 내항의 봄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태안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안흥항#태안#순경#신진항#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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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에 관심이 많다. 함께 쓴 책으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여기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재난을 묻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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