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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바귀 꽃이네, 언제 이렇게 폈지…."
나와 같이 동네 울타리를 따라 걷기운동에 나섰던 친구가 먼저 무더기로 피어 있는 노란 씀바귀 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길섶뿐만이 아니라 잔디밭에도 노란 씀바귀 꽃이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봄에 나물거리로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무지스런 잔디 풀 깎기 기계작업도 지나갔고, 그런데도 퍼져서 지천입니다.
봄만 되면 우리 동네 길섶이나 잔디밭에는 나물을 캐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씀바귀 민들레 냉이 쑥 보리뱅이 같은 것이 기승을 부리고 올라와 잔디 풀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봄에 나도 탐스럽게 올라온 씀바귀를 뿌리째로 캐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쓴맛 그대로 초고추장에 무쳐서 상에 올렸습니다. 쓴맛을 좋아하는 남편의 입맛대로 우려내지 않고 그냥 무쳤던 것인데 정작 쓴맛 덕은 내가 보았습니다.
봄을 타느라고 입맛을 잃어 밥을 반공기도 못 먹고 하던 차였는데 씀바귀나물에 보리밥을 비벼서 먹자 반짝하고 입맛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씀바귀가 미각을 돋구기도 하고 입맛을 살려준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실감났습니다.
친구도 그때 나와 같이 씀바귀나물 캐던 것을 생각했나 봅니다.
"그때 말야, 영감이 딱 한번 집어 먹고 안 먹더라구. 내가 다 먹어버렸지."
친구는 히히 웃습니다. 아마도 딱 한번 집어 먹고 나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나 봅니다.
"혈액순환에 좋고 콜레스테롤도 저하시킨다잖아, 그래서 냉동실에 두구선 나 혼자 다 먹어 버렸다구. 어렸을 땐 상추 쌈을 쌀 적마다 어머니가 연한 씀바귀 이파리 한두 갤 얹어 놓아 주셨는데. 안 먹는다구 하면 눈을 부릅뜨셨었지."
친구는 물 좋고 산 깊은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아직도 시골에는 친정집이 있습니다. 오빠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때만 되면 부산을 떨며 가족들과 같이 승용차를 몰고 친정에 다녀오고는 합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처럼 손자까지 본 오빠가 가을이면 고춧가루와 참깨 등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친구가 부럽습니다. 고춧가루만 해도 일 년 먹을 것을 손가락 하나 까딱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것입니다.
"오빠한텐 씀바귀가 웬수였다구 웬수. 학교 갔다가 오면 그 어린 나이에 호미들구 밭에 들어가 씀바귀랑 풀들을 뽑구는 했다구. 오빠보다 네 살 어린 난 평상에서 또래들이랑 소꿉놀이를 했구 말야. 난 중학교 들어가서두 일 별루 안 했어. 머리 아프네 배 아프네 엄살 떨면서 몰래몰래 극장 가구, 원두막에서 소설책들 읽구 운동화 하얗게 빨아 신고 연애하구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러게, 정말 얄미운 짓만 했네."
"그런데두 오빠가 날 지금껏 챙긴다구."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랑 사시는 분이라 이젠 동생 챙기기가 쉽지 않을텐데."
"이젠 아버지 같은 생각이 들어. 작년엔 땅까지 나눠 줬다구."
"좋겠다, 나도 그런 오빠가 있음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다시 몸을 돌립니다. 걸어야 합니다. 동네 울타리 한 바퀴를 도는데 딱 30분이 걸립니다. 두 바퀴는 돌아야 운동이 됩니다. 한낮이긴 해도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서 울타리 길은 거지반 그늘 길입니다.
하얀 어르신이 잔디밭에 앉아 씀바귀 이파리를 똑똑 따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어르신인데도 친구가 노파심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보다가 부리나케 쫓아갑니다.
"이젠 쇠서 못 먹어요."
"그래두 이파린 먹는다구. 요렇게 새로 나온 것두 있잖아."
"그러네요. 씀바귀 나물 좋아 하시나봐요?"
"요것이 내 보약이지. 요즘 더워서 그런가 막 몸이 늘어지구, 입맛도 없구 자다 깨구 깨구 하지 뭐야."
잔디밭에는 불볕이 꽂히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모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한번 먹을 씀바귀 이파리를 뜯을 양으로 그냥 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정 많고 마음이 여린 친구는 모자의 챙을 깊이 내리더니 어르신 옆에 쭈구리고 앉아 씀바귀 이파리들을 뚝 뚝 땁니다. 하얀 진이 삐직거립니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씀바귀와 친한 터라 씀바귀나물 효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요것이 내 보약이지'라고 한 어르신 말씀이 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부지런히 이파리들을 따가면서 붙임성 있게 말합니다.
"요것이 보잘 것 없는 풀 같아도 효능이 무지 많아요. 입맛 되살려 주지 소화불량 고쳐주지 혈액순환 촉진 시켜주지 설사 멎게 해 주지…."
"어찌 그리 잘 알아? 시골 살았었나 보네. 나두 시골 살다 아들따라 왔는데."
다정해 보입니다. 마주보고 웃기도 합니다. 친구의 손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착한 천성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나도 슬그머니 잔디밭으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친구나 어르신처럼 이파리들이 제대로 따지지가 않습니다. 이파리가 중간에서 끊어질 때도 있고 꽃대가 같이 따라서 뜯길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꽃대를 떼어내 버릴 수밖에 없는데 풀 속에 버려진 노란 꽃이 더욱 예뻐 보이면서 미안해집니다.
친구도 나도 한 줌이 될 적마다 어르신이 든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넣고 합니다. 비닐봉지가 반 정도 차오르자 친구가 비닐봉지에 손을 넣어 꾹꾹 눌렀습니다. "데쳐서 냉동실에 두구 잡수세요" 하면서.
비닐봉지가 넘치게 차올랐습니다. 어르신이 "어구구 허리야" 하면서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환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덕분에 입맛두 살아나구 잠두 자알 오겄어."
"그러셔야죠."
"근데 초고추장에 무치세요?"
"슴슴한 막장에 무치지."
나도 요즘 들어 몸이 늘어지면서 기운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되고 밤에 잠이 깨고, 깨고 합니다. 얼마 전에 한나절 걸려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보면 이상이 한 군데도 없는데 아무래도 집안일로 받은 스트레스가 덜 풀려서 마음이 편치 못해서 그런가 봅니다.
남편은 밤에 잠이 깨고, 깨고 하는 것처럼 힘든 것도 없다고 하면서 잠자기 전에 포도주 한 잔을 마셔보라고 했습니다.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 술을 모르고 살아서 그런지 다음날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고 머리가 무거워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나물을 많이 먹고 자랐습니다. 배추우거지나물 무나물 가지나물 호박나물 고춧잎 나물 시래기 나물, 어쩌다가는 비싼 축에 드는 고사리 도라지나물도 먹었습니다.
그랬던 내 뱃속인지라 씀바귀나물이 내 체질에도 딱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씀바귀나물 반찬을 먹고 소화가 잘 되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불면증도 없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르신처럼 나도 씀바귀나물이 '요것이 내 보약이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부지런히 씀바귀 이파리 한 줌을 뜯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친구도 한 줌을 뜯었습니다. 친구가 내일 걷기운동을 하러 나올 때는 비닐봉지 하나를 가지고 나오자고 합니다. 순간 보약 한 가지를 챙긴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마주보고 히 웃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