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화면에 나오는 인물이 바로 마스토미다. 그는 ▲일본이 선진이고 조선은 후진이며 ▲조선인의 궁핍은 조선인의 태만 때문이고 ▲(일본인) 지주의 이익은 곧 (조선인) 소작인의 이익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상호 융화를 위해 노력한 한국 근대화의 은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일본 측은 그를 선의의 일본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일기나 편지 등을 살펴보면, 그가 절대로 조선을 사랑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화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선 소작인의 빈궁을 소작인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렸다. 일본이 조선 소작인을 착취하는 측면을 은폐했거나 혹은 간과한 것이다.
"많은 공부와 연구,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표현에서 그의 인식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통치가 문제가 아니라 소작인의 게으름과 무식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화면에 의하면, 그가 조선인 소작인의 이익을 배려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일본인 지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화면에 따르면, 그는 "소작인은 지주의 뜻을 받아 지주의 손발이 되어 각각의 일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작인이 지주의 손발이 되어 지주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과연 조선인 소작인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물질적 관계가 아닌 정신적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찌 들으면 아름다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 말에는 깊은 위험성이 숨어 있다.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물질적 관계다. 지주는 땅을 빌려주고 적당한 소작료를 받으면 되는 것이고, 소작인은 열심히 일을 하여 적당한 소작료를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 관계가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지주와 소작인이 정신적 일치성을 느낄 수 있을까. 제대로 대우도 못 받는 소작인이 지주에 대해 정신적 일치성을 느낀다면, 그 관계에서는 일종의 착취 현상이 생기게 될 것이다.
'가족처럼 일하실 분'이라는 사원모집 광고처럼 더 무서운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집광고를 내건 사업체 중 일부에서는 가족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적은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 같은 관계가 아니더라도 월급을 제대로 주고 노동시간이 적당한 기업이 진정 훌륭한 기업이 아닐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정신적 관계로 만들어야만 조선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마스토미의 일기장을 보면서, 종교 열심히 믿는 점포 주인이 어린 종업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 그런 걸까.
마지막 화면을 보면 그가 과연 조선 독립을 지원한 인물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에게 보낸 1912년 4월 3일자 편지에서, 일제통치를 조선의 당연한 운명으로 치부한 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은 신이 명령한 특수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이 국가주권을 회복하고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예수를 믿고 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독립할 수 있다."
식민통치를 신이 부여한 운명으로 알고 일단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독립을 기대해야 한다는 그의 일기장에서, 과연 조선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을까? 그보다는 모욕감을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마스토미는 겉으로는 조선인을 위하는 것처럼 활동했지만, 실은 조선인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독립심을 저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세우고 전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 지역과 일부 종교인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학교를 세웠고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을 내세웠는지를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추진한 활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일기장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도 결국 일본인이었다는 점이다.
위선적 일본인인 마스토미 야스자에몽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된 사실은,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아직도 불철저함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가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식민통치의 위험성만 강조했을 뿐, 속에 은폐되어 있는 본질적인 위험성은 간과했던 것이다.
총칼을 앞세운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를 앞세운 침투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친일청산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은 눈에 보이는 총독부 청사만 허물었을 뿐, 의식 속에 숨어 있는 총독부 청사는 허물지 못했다.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인 지배를 꾀한 '영악한' 일본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훈장 수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