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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얼굴보다 실내화를 먼저 내민다.
"엄마 깨끗하게 빨아주세요. 냄새나요."
실내화에 비누를 묻혀 닦았다. 때가 쉽게 빠지지 않는 부부엔 치약을 살짝 묻혀 닦으니, 금세 깨끗해졌다.
여유가 있어 두 켤레 사서 번갈아 신겼으면 좋았을 텐데, 한 켤레만으로 신기다보니 학기초에 산 실내화는 벌써 헌것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새것보다는 깨끗한 게 더 보기 좋다는 옛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신발바닥까지 깨끗하게 닦아 창틀에 올려놓으니 기분까지 맑아지는 것 같다.
어릴 적, 토요일이면 나와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빨래터에서 만났다. 그리고 일주일내 입었던 옷을 방망이로 두드려가며 빨았다. 아무리 찌든 때도 방망이질 두어 번이면 언제 더러웠냐는 듯 깨끗하게 빨리곤 했다. 사실 빨래보다는 매일 보는 그 얼굴에서 매일 듣는 그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수다가 좋았다. 그래서 토요일 빨래터에는 빨래보다 수다가 더 장황하게 널리곤 했다.
그 사이에도 운동화는 커다란 함지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불려지고 있었다. 새 운동화는 신기도 아깝지만 신고난 뒤 빨기는 더욱 아까웠다. 왠지 빨아버리면 그 뒤로는 더 이상 새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빨 거면 진짜 새것처럼 하얗게 빨기 위해 아끼던 치약을 사용해서 광을 내보기도 하고,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끈 따로, 깔창 따로, 신발 따로 빨았다.
그럴 때는 거칠기만한 샘터의 돌빨래판보다 부드럽게 골이 패인 나무빨래판을 가진 미라가 부럽기도 했다. 미라의 운동화끈은 좋은 빨래판덕에 올이 나가지도, 보푸라기가 생기지도, 거칠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빨래판을 빌리자니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았다. 슬쩍 물 한두레박을 퍼 담아줘도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가시나는 그 넓은 빨래판 위에서 제 운동화끈만 물고 늘어져 있다. 하긴, 그래봤자 언니 셋을 거쳐서 내려온 미라의 신발은 지난주에 새로 산 말표 내 신발을 따라올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빨래판을 가진 미라도, 새 운동화를 가진 나도 절대 빨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신발 밑창이었다.
신발 밑창을 닦으면 엄마에게 병이 찾아온다
신발 밑창을 닦으면 엄마에게 병이 찾아온다는 루머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됐는지 알 수 없다.그냥 운동화를 신을 나이, 제 운동화를 빨 나이가 되면 빨래터에서 그 루머는 언니에서 동생으로 동생에서 그 동생으로 구전동화처럼 이어졌다.
낳아 놓으면 그저 저절로 크는 줄 아는 것도 부족해 때로는 주사와 폭력까지 자식사랑인 양 보여주시던 아버지에 비해, 엄마는 아버지의 말을 빌자면 '돈 한 푼 벌어올 줄 모르는 밥버러지'에 불과할지라도 자식들에게는 유일한 의지가지요, 유일한 목숨 줄이었다.
엄마에게 병이 찾아온다는 말은 제 아무리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철부지라도 그 의미가 어떤 건지 알리라.
내 친구 중,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운동화밑창을 빠는 사람은 없었다. 때로는 길가에 철퍼덕 뿌려놓은 소똥을 밟아 신발 바닥이 온통 소똥일색이더라도, 풀밭에다 쓱쓱 문질러 버릴 뿐 그것이 더럽다고 하여 솔로 씻거나. 비누를 칠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단 한 번도 운동화 바닥을 닦아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 쉬면 안 되는 사람, 놀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내 엄마뿐만 아니라 모든 엄마는 그 삶마저도 너무나 불쌍했기에 아픔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발밑창을 한 번도 빨지 못하면서까지 그리 빌었던 딸의 노력이 무상하게 지금의 내 엄마는 환갑이 저만치인데도 안 아픈 곳이 없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여자임을 느껴보지도 못한 채 끝이 났고, 그 자리에는 허함과 외로움만이 자리하고 있다. 또 당신 몸에 있는 관절임에도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 볼 수도 없는 고통에,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서리 내린 늦가을 빈 들녘 같은 추레함만이 남았다.
한 번도 안 닦았건만...
그 엄마를 보면 배신감이 든다. 운동화를 10번도 더 빨고 싶은 것을 참고 한 번도 안 빨았는데, 흙도 소똥도 다 엄마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서 단 한 번도 털어내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왜 그 마음도 몰라준 채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걸까.
창문틀에서 금세 말라가는 운동화를 보니 화가 났다. 나는 아들의 운동화를 빨 때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운동화밑창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내 아이들은 자식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세월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부모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몸이 아픈 것이 내 엄마의 잘못이 아닌 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자식에게 엄마의 아픔은 자식에겐 죄가 되기도 한다. 잘 살지 못한 회한이 되기도 한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은 그런 바람들을 제쳐두고서라도 발 냄새를 맡으며 운동화를 빨던 그 시절의 덜 가짐이, 부족함이, 퍽퍽함이 그립기도 하다.
엄마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