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죽은 후에도 사마의를 물리쳤다고 한다. 죽어서조차 적군을 물리치는 위대한 제갈량과, 죽은 제갈량에 쫓겨 달아나는 초라한 사마의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제갈량을 미화하려는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달리 왜곡되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박정희가 죽은 지 28년이 지났다. 죽은 뒤에도 박정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유비가 세운 촉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제갈량처럼, 18년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미화된 박정희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개정판 알몸 박정희>에서는 부풀려지고 미화된 허위의 가면을 벗겨내고 알몸 박정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황국신민의 충실한 적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 나폴레옹이나 천황을 뛰어넘어 무한 권력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 이순신 조차 호위병으로 거느리고자 했던 박정희의 실체를 거침없이 폭로하고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황국신민이 되다

▲ 책표지
ⓒ 인물과 사상사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박정희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의 위기에 시달렸다. 식민지 현실의 가혹한 상황 속에서 가난에 시달린 어머니에게 일곱 번째 아이의 임신은 어머니를 절망적 자학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절망적 자학에 빠진 어머니의 선택은 '태아 죽이기'였다. 태아를 죽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한다. 태아 시절 경험한 죽음의 공포는 박정희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의식 형성으로 이어졌다.

세계를 '폭력적 질서'로 감지한 그의 무의식은 정복주의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회피의 길'이라는 생존전략은 어머니와 가족과 친구와 조국을 버리는 '모태 배신'으로 나타났다. 어머니·가족·친구·고향·조국은 모두 '폭력적 질서'에서 맞으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어머니·가족·친구·고향 그리고 조국을 결사적으로 떠났다. '때리는 편'에 서기 위해 평생토록 달리고 또 달렸다. (25쪽)

구미보통학교 3학년 때 박정희는 급장이 되었다. 학업 성적이 1등인 아이에게 주어지는 급장의 본질은 최우수 황국신민에게 주어지는 영광이었다. 영광에 걸맞게 강력한 학급 통솔의 권한도 주어졌다. 뇌물로 사거나 부모의 빽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1등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급장은 일제가 인정한 '체제 권력'의 핵심이다.

급장이 된 박정희는 그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급장이었던 박정희에 의해 맞아보지 않는 아이가 드물 정도였다. 동네 친구도, 자기보다 키가 큰 아이도, 나이가 위인 동급생도, 심지어는 나이도 많고 결혼까지 한 동급생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급장인 박정희에게 맞은 아이들은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급장권력이 일본 제국주의의 체제권력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 법, 10대의 박정희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장래가 촉망되는 황국신민이 된 것이다.

이순신 성역화에 담긴 뜻

박정희는 권력을 잡은 후 곧바로 이순신을 성역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성역화를 위한 박정희의 집착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순신 작품집 번역 발간, <난중일기> 국보 지정(76호), 홍보 책자 발간, 이순신 이야기 교과서 등재, 글짓기 대회, 각종 기념행사, 현충사 성역화와 국민 참배, 수학여행 의무화, 탄신 기념일 제정, 국가 제사, 통영을 충무로 이름 변경, 이순신 동상 건립, 영화 제작과 단체 관람 … (89쪽)

박정희의 이순신 성역화는 이순신을 위한 게 아니라 박정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저자 최상천은 거침없이 폭로한다.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와 현충사 성역화와 국민 참배는 모양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일본의 신사가 다신을 섬기는 것이라면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현충사 참배는 일신교란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현충사를 유일 신사로 만든 박정희의 속셈은 무엇일까. 성웅 이순신을 유일 신사로 만들고 박정희 자신은 교주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명망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의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을 세종로 이순신의 동상에서 찾고 있다.

이순신 동상은 충무로가 아닌 세종로에 서 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집총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는 이순신의 동상은 군대 정문을 지키는 위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순신 동상이 지켜주는 게 무엇일까. 청와대라는 것이다. 이순신을 자신의 권력을 지켜주는 수문장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 이순신 성역화의 본질이라고 폭로한다.

역사적 상상력이 뒷받침된 거침없는 폭로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최상천의 글은 거침이 없다.

장래가 촉망되는 황국신민의 적자가 되어 조국을 버린 인물, 최우수 제국 군인이 되어 '요오시 조센징 토벌이다!'를 부르짖던 인물, 일본 패망 직전에 가짜 광복군으로,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동지들을 배신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5·16 구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나폴레옹보다 천황보다 높은 유일 권력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의 알몸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있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금방이라도 나라가 망해버릴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을 살아온 이들에게 박정희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직도 신격화된 '박정희의 향수'에 머물러 사는 이들도 많다.

신이 아닌 인간 박정희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 <개정판 알몸 박정희>를 권해주고 싶다. 맹목적인 그리움과 향수를 벗고 제대로 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디딤돌이 될 만한 책이라는 생각에서다.

알몸 박정희 - 개정판

최상천 지음, 인물과사상사(2007)


#박정희#최상천#이순신#알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