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시청 앞에서 농민들의 한미FTA 반대 집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 유엔 난민의 날 기념 세계 어린이 난민돕기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광장에서 수많은 이 땅의 농민들이 자기들이 난민이 될 지경이라고 아우성인데 한쪽에선 지구 반대편 난민을 걱정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참 오지랖도 넓은 나라다. 저 거대한 크기의 고해상도 사진전은 누구의 비용으로 치러졌을까?
저 위 해맑게 웃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죽어가게 한 건 자유무역이다. 제국주의와 자유무역은 이음동의어다. 한미FTA에 강력한 관심을 갖고 있는 제약자본은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나 에이즈로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지적재산권을 신경 쓸 뿐이다.
그들과 한국정부는 지적재산권을 강화하면 혁신적 신약개발 의욕이 고취돼 인류의 복지가 향상될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한 채 강화된 지적재산권은 전혀 인류의 복지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제약자본은 지적재산권 강화와 상관없이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을 살 저 아이들에겐 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인 중산층이 필요로 하는 온갖 성인병, 성기능 강화 약물의 개발엔 돈을 쏟아 붓는다.
그들은 강화된 지적재산권으로 저 아이들에게 저렴한 제네릭 에이즈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막는다. 그들은 한국인에게 제네릭 약품이 공급되는 것도 막으려 한다. 시청 광장의 민중의 자식이 필요로 하게 될 약물의 개발·공급도 줄어들 것이다. 구매력이 없을 테니까. 그 아이들을 국가나 혹은 경영자가 위하려 한다면 투자자가 막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자유무역이다. 자본(투자자)와 소비자만 남겨진 세상. 그들에게만 허락된 자유.
제3세계의 외채는 미국의 1980년대 자유화(보수화) 이후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미국이 이자율을 올렸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국가들은 외채를 갚느라 국가예산의 40% 가까이를 소비한다고 한다. 공공예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마치 우리나라가 IMF 이후 IMF(미국)의 요구에 따라 급격히 이자율을 올리면서 부자들만 더 부자가 되고 전 국민이 수렁에 빠진 것처럼 제3세계는 거대한 수렁에 빠졌다.
제3세계는 시장에서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을 내다 팔 것을 요구받았다. 그것은 결국 부존자원과 농산품이었다. 농산품이 달러벌이 수단이 되면서 그 나라들은 제 나라 백성을 먹여 살릴 기본적 농업을 포기하게 됐다. 또, 모두가 자원과 농산품 수출에 매달리면서 가격은 점점 내려갔고 빚은 더욱 더 족쇄가 되어갔다(우리나라는 과거 개발 시기 이런 자유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었다. 예를 들어 당장 돈이 되는 머리카락의 자유로운 수출을 국가가 금지했다. 가발공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동양의 역사를 보면 세금을 돈으로 내게 하면 농민이 곧 전락한다. 왜냐하면 농산품 가격이 한번만 떨어져도 농민은 고리대금업자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원리로 제3세계 아이들은 선진국이란 고리대금업자의 포로가 됐다.
자유무역의 원리는 그런 나라들에게 탈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복권을 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민중은 자본(투자자)에게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자유화는 그 자본(투자자)를 규제할 국가권력을 거세한다. 그리하여 자유경쟁의 시장에서 약자는 언제나 강자의 먹이가 될 뿐이다.
그 약자의 비참한 생활은 때때로 강자의 인간적인 면을 흔든다. 그리하여 약자들이 비참하면 비참해질수록 그 약자들의 생활상은 연민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강자들은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그들을 돕는 부의 재분배는 용납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털어 그 약자를 구호하는 정서적 호사는 선호한다.
가장 비참한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세계 중산층의 정서적 호사를 위한 기호품이 된다. 결국 매우 빠른 속도로 백만장자가 늘어가고 있는 이 자유화 모범국 대한민국의 수도 한 복판에 저런 전시회가 열린다. 한미FTA의 자유화와 함께. 제 나라 민중의 절망과 함께.
이 땅의 민중은 제 나라 국민의 한갓 연민의 대상에서조차 탈락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멋진 내쇼널지오그래픽 사진으로 전해지는 비참한 아이들의 모습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연민의 대상이지만 이 땅의 민중은 구질구질하고 시끄럽기만 한 이방인일 뿐이다.
한 아프리카의 저널은 자기 나라의 국민이 제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고 썼다. 한미FTA 추진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 민중도 이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노동자고, 농민이고, 구조조정의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이 땅의 주인은 오직 구조조정의 주체인 자본(투자자)뿐인 것 같다. 그 외엔 이방인이다. 그리하여 그 주체들만 부자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그들의 잔치(주가폭등)가 벌어진다. 이방인은 길바닥에서 소리만 칠뿐이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그 이방인의 자식 대가 돼선 소리칠 기운조차 사라질 것 같다. 미국의 이방인인 흑인들처럼. 자기 나라 흑인 아이들이 마약하고 총 맞아 죽은 데는 냉담하면서 아프리카 난민에 열광하는 미국 중산층같이, 우리도 제 나라 노동자, 농민의 고통엔 냉담하면서 세계의 난민을 염려하는 선진국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