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방님들, 그중에서도 거대한 몸집으로 날개를 펼치실 때마다 푸드득 푸드득 조류비행 사운드 효과를 내시는 조류나방님들. 이분들은 뭐 거의 다른 동급 벌레님들에 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공포감을 안겨주신다. 거기다 한 번의 날개짓으로 알밥 위의 날치알처럼 비듬가루 소복이 뿌려주시니 공포감도 공포감이지만 시각상 거부감이 팍팍 들 수밖에.
올해에는 좀 서로 모른 척 하고 살 수 있길 바랐지만 이 양반들 인간애가 또 살뜰하시니 여름이 되기도 전에 겨우내 안부인사차 납셔주셨다.
꼬냥이 백내장 수술 직전, 그야말로 눈앞에 뵈던 게 없던 그 시기. 그래도 먹고 살아보겠다고 '김밥지옥'의 김밥 한 줄을 달랑 사서 룰루랄라~ 들어와 심봉사처럼 더듬더듬 냉커피 한잔을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등 뒤의 살기는 뭐라지. 누군가 등 뒤에서 날 노려보는 듯한… 이 한여름 얼음이 녹아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마시는 기분.
휙 고개를 돌리자 나와 눈이 딱 마주친 그분!!! 그분은 내 손바닥만한 몸집에 그로테스크한 문양을 휘두른 조류나방님이셨다.
"우어어어어!!!!!"
어찌나 몸집이 장대하신지 말로만 듣던 모스맨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면서 쥐가 난 듯 지릿해져옴을 느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하느니...!!!
김밥을 내동댕이치고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곳은 하필이면 욕실. 문을 닫고 쭈그리고 앉자마자 몰려드는 급후회.
'부엌으로 갈 걸. 왜 하필이면 욕실로 기어들어 왔다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렇다. 난 조류나방님에게 어떤 해를 끼칠 배짱도 없었는지라 그저 몸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분이 방을 원하시면 방을 내드리고 나는 자리를 피해드리는 것이 인간된 예의… 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배알도 없는 것.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욕실보다는 먹을 것도 있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부엌이 더 낫지 않은가. 또 내가 부엌에 나와 있으면 조류나방님을 가둔 셈이지만 내가 욕실에 있으면 왠지 내가 갇힌 것 같아 모양새가 빠지지 않는가 이 말이다.
혹시나 그분의 참선에 방해될까 두려워 살포시 비굴하게 욕실문을 약 2센티 정도만 열고 동태를 살폈다. 조류나방님, 앞으로 진정한 조류로 거듭나기 위한 수행에 들어가신 듯 한치의 미동도 없이 하필이면 머리꼭대기 천정에 붙어 계신다. 그런 와중에도 삼복 브라더스, 혼자 왜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 댕굴댕굴 현 사태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는 표정이다. 부러워, 부러워, 부러워!!!
10분, 20분, 30분….
다리도 저리고 배도 고프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나가주시면 좋지만 조류나방님이 먼저 우리 집이 흡족하시어 택하셨으니 나가실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욕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리비리비리- 머릿속에 탈옥범 석모씨의 몸 문신처럼 옥탑의 구조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뭐 그려놓고 보니 별거 없네.)
일단 욕실 문 앞에 쌓여 있던 빨래 더미로 손을 뻗어 겨울용 파카와 모자를 잽싸게 들어올리고 쾅! 문을 닫았다. 다시 2센티의 비굴한 문틈을 열고 동태를 살폈다. 별 반응이 없으신 조류나방님. 다시 한번 용기를 내 빨래 더미 속에 얌전히 잠자고 있는 커튼 두루마리를 끌어당겼다. 그때! 뭔가 움직임이 느껴지셨던지 다시 푸드득 날아올라 용트림을 하시는 조류나방님!!!! 제발 제발 자제요!!
문을 닫고 난 교도소 탈출의 탈옥이 아닌 옥탑에서의 탈출인 그 탈옥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조류나방님이나 곁다리로 출근하시는 괴력의 육식바퀴님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전혀 나의 존재를 개의치 않으시고 용무를 보시는 그 당당함 때문이다. 그러니 난 그분들이 오시면 방을 비워드리고 게임방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옷과 지갑을 챙기는 사이 나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스물아홉 덜 폈다 하면 독자 우롱이지만 그래도 아직 끝물은 아닌 내 덜된 삶을 심장마비로 끝낼 수도 있다는 것.
나는 반드시 살아서 이 집을 나가야 한다
욕실 거울 앞에 우뚝 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환청인 듯 Bee Gees의 Holiday가 들려왔다. (얼쑤)
-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 ♪
겨울용 파카를 입었다. 이미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건 개의치 않았다. 자유를 위한 갈망, 벗.어.나.야.한.다.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커튼씨를 끌어올렸다. 너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창가에 결박된 채 원치 않는 햇살과의 전쟁을 치렀느냐. 이제서야 지친 몸 세탁기에 맡긴 채 쉬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조류나방의 침범에 좌절되어 다시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구나. 커튼씨에게 씁쓸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내 허리에 둘둘 감았다. 당시 나의 복장이 반바지였으므로 적군이 하강하여 다리로 공격해 온다면 그 또한 급소를 찔리는 셈이므로 커튼씨를 방패막이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욕실에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로 먹고사는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나 군인들도 위장 크림을 바르던데 나도 뭐 좀 그냥 부가옵션으로 얼굴에 하나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치약을 바를 수는 없잖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바로 돌격하여 선반 위 열쇠, 화장대 위 지갑, 방바닥 핸드폰, 옷장 속 청바지를 신속하게 습득하고 부엌으로 튀면 된다. 허둥대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혹 적군이 나에게 촉수를 들이밀더라도 절대 눈을 감지 말자!
카운트, 5-4-3-2-1!! 돌격 앞으로!
"우워워워워!!!"
욕실 문을 열고 마음 속에 정해둔 동선대로 신속하게 몸을 움직였다. 마치 게임 속의 미션을 깨는 캐릭터가 된 기분.
[미션 1] 조류나방의 공격을 피해 선반 위 열쇠를 습득하세요, 정해진 시간은 5초입니다. 시간 초과시 조류나방의 비듬 투하를 받습니다.
뒤뚱뒤뚱, 이 무슨 쇼질이신지. 신속한 움직임으로 열쇠를 습득할 수 있었다. 다음 뭐더라, 뭐였지, 허둥지둥 긴장한 나머지 다음 동선을 잊은 채로 방안을 뒤집고 다녔다. 파카에 커큰 둘둘 말고 뒤뚱거리는 곰 같은 형체에 조류나방님도 놀라셨는지 갑자기 그 큰 날개를 휘적대시며 날아오르기 시작하신다.
"우워워워!! 살려줘, 살려줘!!"
에라, 모르겠다. 열쇠랑 지갑만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두 팔을 허우적대며 부엌으로 뛰어나왔다. 문을 닫으려니 방안에서 뒹굴거리시는 삼복 브라더스.
'놔두고 문 닫아버릴까, 열어놓고 나갈까, 그래, 열어놓고 나가면 조류나방님도 때 돼서 나가시겠지.'
그 짧은 찰나에 과감히 삼복 브라더스를 조류나방님과 동침시키기로 결정하고 냅다 튀어버리는 꼬냥이.
"우워, 우워, 우워!!"
허둥지둥, 뒤뚱뒤뚱, 비둥비둥 옥상으로 뛰어나오니 또 옥상에서 뭔가 청소나 기타 잡일을 하며 배회 중이신 배추도사.
"할아, 할아… 아저씨, 할아버지!!"
"으따!!!! 뭐여!!"
꼬냥이의 반똘끼 패션을 보고 기겁하신다. 생각해보라, 얼굴에 수건을 두른 채 모자 쓰고 파카 껴입고 커튼까지 질질 끈 인간의 형상.
"나방, 나방, 방에 나방!!"
잘 올려지지도 않는 팔을 들어 곰새끼처럼 방 안을 가리켰다. 어찌나 절규를 했던지 우리 배추도사님, 후다닥 방안으로 들어가 주신다.
"뭐여, 저거 말이여?"
"우워워워!!!!! 나방, 나방!!"
배추도사, 꼬냥이를 이래~~~~~ 한번 보시더니 휴지 딱 2칸을 말아 벽에 붙어 계신 조류나방님을 스윽 '닦으신다.'
"이게 무서워서 그 꼴을 한겨?"
"우워!! 대단해요!! 우워!!"
"아, 그 곰 같은 것 좀 벗고 말혀!"
"크죠? 크죠? 진짜 크죠?"
"강원도 군부대에는 더 큰 것도 나와."
"우워!!!!"
샤르르르르… 그동안의 배추도사에 대한 비호감이 눈녹 듯 사라졌다. 멋지다! 급호감으로 주가 올라가신 배추도사 '어르신', 그분의 대범함에 존경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그리고 휴지 2장 속에 고요히 잠드신 조류나방님.
조류나방님, 이제 세렝게티 옥탑으로 수행 오시는 건 자제해 주세요, 세렝게티에는 든든한 살충전문가가 있거든요. 우쭐, 우쭐~♪
갈수록 못났다… 흑.
덧붙이는 글 | 작품 사용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네이버 웹툰 '마음의 소리' 작가 조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브라보~!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