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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전략은 불균형 발전전략으로 평가된다.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을, 농촌보다는 도시를 우선적으로 개발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부의 불균등 분배를 초래하는 것인 동시에, 한정된 자원으로 단기간에 고속 성장을 이루려 할 때에는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1970년부터 5·16 정권은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재벌기업과 도시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군사정권이 농촌을 주된 타깃으로 하여 새마을운동을 벌인 것이다. 혹 이것은 모순이 아닐까? 5·16 군사정권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새마을운동을 벌인 걸까?
그 동기는 5·16 정권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5.16 군사정권은 기본적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군국주의 정권을 모방한 권력이다. 군사정변을 일으킨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화 경제개발을 급속도로 추진한 것도 그렇고 또 사회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것도 그렇다.
일본에서는 다이쇼 시대(1912~1925년)에 흥기된 민주화 열기인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군국주의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6, 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새마을운동과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은 닮은꼴
그럼,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일본군국주의 정권의 실적 가운데에서 새마을운동과 닮은꼴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 닮은꼴을 바로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방개량운동은 1908년 10월 일왕의 무신조서(戊申詔書)를 계기로 시작된 농촌개량운동인 동시에 국민교화운동이다.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역사학자도 최근에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일본 학자가 몇몇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도 운동의 배경 및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이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지방개량운동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시작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 역시 한국에서 자본주의 공업화가 급속도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지방개량운동은 부락의 융화, 부락 재산의 축적, 권업(勸業)의 추진, 근면저축의 강조, 교육의 진흥 등을 내용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유사하다.
지방개량운동과 새마을운동의 이와 같은 유사성을 볼 때에, 최근 중국에서 일고 있는 신촌운동(新村運動, 새마을운동의 중국식 표현) 열기는 다소 방향이 빗나간 것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일부 중국 지식인들은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사를 연구하는 차원에서 신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신촌운동에서 한국적 자본주의의 특색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한국적 특색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촌운동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는 중국 학생들은 서울행 비행기가 아닌 도쿄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지방개량운동을 그대로 모방
그럼, 새마을운동의 본보기라는 지방개량운동은 도대체 왜 시작된 것일까? 자본주의를 한창 발달시키던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군국주의 정권이 다소 엉뚱하게도 농촌개량사업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이 어떤 의도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살펴보면, 5·16 군사정권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의도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민속학자인 아리이즈미 사다오가 1968년에 일본 학술지인 <역사학연구> 341호에 기고한 '명치국가와 축제일'이란 논문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문의 제3장 "축제일의 정착과정-지방개량운동"의 주요 부분을 발췌·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190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완전한 제국주의국가인 동시에, 아시아에서 유일한 식민지 보유국이 되었다.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과 대치하는 한편 동아시아 민족들의 저항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일본은 끊임없는 긴장과 임전체제 속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구된 것이 바로 군사력의 강화였다.
이때 군 지도자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한) 의지처로서 기대한 곳은 바로 가(家)와 향토였다. 가와 향토는 일본 서민들에게 정신적인 헌신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군 지도자들은 병영을 가에 대치시키고 향토에 대한 충성을 매개로 천황의 군대에 대한 헌신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현실적인 가와 향토는 자본주의경제의 발달과 군확경제(軍擴經濟)의 여파로 인해 붕괴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군대 교육의 의지처가 되기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은 두 가지 대책을 내놓게 되었다.
첫째, 현존하는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키는 일체의 것을 근절한다. 둘째, 가와 향토의 재정 및 윤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내무·문부 관료들을 앞세워 지방개량운동을 전개한다."
군국주의 일본이 지방개량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이에 따르면, 군국주의 일본이 지방개량운동을 벌인 의도는 다음과 같은 3단계 논리구조로 설명될 수 있다.
(1)러일전쟁 이후 서양과 경쟁하고 동아시아 민족들의 저항을 탄압하려면, 일본 자신이 긴장과 임전체제 속에서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군사력을 강화하자면 국민의 충성심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 및 향토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존 충성심을 국가 및 군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3)향토에 대한 충성심을 국가·군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시키자면 농촌이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당시 일본 농촌은 자본주의와 군확경제의 여파 때문에 붕괴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군국주의 일본은 농촌을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지방개량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은 일본의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주로 농촌 출신인 군인들이 고향의 붕괴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군대에 충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촌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지방개량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덧붙이면, 농촌 출신들의 의식 구조를 군국주의적 사고에 맞도록 개조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5·16 군사정권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한국의 상황도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의 상황과 유사했다.
일본과 서양의 경쟁구도가 성립했듯이, 남한과 북한의 대립구도가 심화되었다. 일본이 대외침략에 대한 조선 등 동아시아 민족들의 저항을 우려했듯이, 5·16 정권 역시 학생·청년 주도의 민중저항운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근대화의 추진으로 일본 농촌이 붕괴 직전에 있었듯이, 산업근대화의 추진으로 한국 농촌 역시 위기 상황에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 유지함으로써 농촌 출신들을 안팎의 적들과 경쟁체제에 안정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시작한 일본의 지방개량운동을 모방한 것이었다. 5·16 군사정권이 일본 군국주의정권의 성과를 흉내 낸 모방품이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동기야 어쨌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개량하기 위한 것인데, 동기가 나쁘다 하여 새마을운동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새마을운동이 결국 한국 농촌에 무엇을 선사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힌 것은 새마을운동의 표면적 측면에 불과하다. 그 배후에는 국민들을 항시적 긴장체제로 동원하기 위한 보다 본질적인 측면이 내재되어 있다.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군사독재의 사고방식에 맞도록 개조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운동 시기에 한국의 경제적 자원들은 농촌이 아닌 도시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가장 큰 혜택을 누린 주체는 도시의 재벌들이었다. 농촌에서는 초가집이 없어지고 마을길이 넓어지기는 했지만, 정작 농가의 부는 곳간에서 새어 나가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으로 확실히 바뀐 것은 의식구조였지 농가 살림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 농업이 자유무역협정(FTA) 앞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5·16 군사정권의 도시 및 재벌 위주 경제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60년대부터 파괴되기 시작한 이래로 한국 농촌은 아직까지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5·16 정권의 농촌정책이 근저에서부터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국가정책의 결과 못지않게 그 동기도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책의 동기가 나쁘면 그 구호와 표면적 성과가 아무리 그럴싸할지라도, 어딘가에는 독소가 숨어 있어서 국민들을 해하기 마련이다.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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