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마마 전상서'
그 필체는 왕의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화안공주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화안공주는 왕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때로 시중에서 불리는 노래를 적어 보내고는 했는데 그로인해 화안공주의 필체는 왕의 눈에 익어 있었다.
'아바마마 전 이 낯선 땅 신라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본시 저와의 정이 없고 임지도 먼 곳이라 혼인 후에 거의 얼굴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남편이 돌아 와서는 시중의 헛된 소문을 믿고 저를 핍박하여 제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갔습니다.
게다가 남부여와 전쟁이 벌어져 곧 저를 내친다고 하니 이 몸 갈 곳 없어 막막할 따름입니다. 다행이 남편이 저를 따라온 고도를 쓸모 있게 여겨 종군(從軍)하게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서찰을 보내었나이다. 이 서찰이 무사히 아바마마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나이다. 이 서찰을 보시거든 고도의 말을 쫓아 제 남편이자 신라의 아찬인 김무력을 사로잡으시옵소서. 그리고 김무력을 볼모로 저를 다시 아바마마의 곁으로 불러주시옵소서.'
비단 두루마리 위로 왕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졌다. 좌평 관석은 이미 슬쩍 두루마리의 내용을 들여다본지라 왕의 눈물에 대해 짐짓 외면하고 있었다.
"좌평, 고도를 당장 이리로 불러오시오."
좌평은 병사를 불러 고도를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고도는 왕의 앞에 다다르자마자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폐하! 그간 얼마나 심려가 크셨습니까!"
오열하는 고도의 앞에서 왕은 언제 눈물을 흘렸나는 듯이 늠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은 오히려 고도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뜸 호통부터 치기 시작했다.
"내 너에게 공주를 잘 보필하라 신라로 보냈거늘 어찌하여 홀로 이리 돌아왔는가!"
"폐하! 제 불찰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고도는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자신을 자책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급기야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릴 지경이 되자 보다 못한 병사들이 고도의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 서찰은 어떤 연유로 지니게 된 것이냐?"
비록 마음은 심란했지만 왕의 판단은 흐려지지 않았다. 공주가 쓴 서찰은 필체는 비슷했지만 왕의 마음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아뢰옵니다. 공주마마의 남편인 김무력이라는 자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공주를 핍박하고 괄시하며 소리치기를...... 그 말에 공주마마가 실신했사온데......"
고도가 머뭇거리며 말을 잊지 못하자 침착함을 유지했던 왕은 약간 조급함을 내보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공주가 정신을 잃었는지 어서 말해 보거라."
고도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참람한 소리를 함부로 할 수가 없나이다."
"너는 말을 전할 뿐이지 않느냐. 어서 얘기해 보거라."
땅을 짚고 있는 고도의 주먹이 흙까지 움켜진 채 불끈 쥐어지자 옆에 있던 병사는 행여 있을 불상사를 염려해 슬쩍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자가 말하기를 '네 애비의 목을 벤 후 돌아와 너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불경스러운 말에 열의 옆에 도열한 좌평과 장수들은 얼굴을 붉혔지만 왕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공주님을 구하고 전쟁에도 이길 수 있는 묘책을 전하기 위해 신라군의 진영을 탈출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 방법이 있느냐?"
좌평 중 하나가 성마르게 물어보자 고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김무력은 원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수는 서라벌에서 이끌고 온 기병 일 천기 등 원병이 더해져 도합 일만이나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관산성으로 가는 길목은 험준하니 병사들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지나가는 순간 기습하면 김무력은 어렵지 않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로잡은 김무력과 공주님을 교환하소서. 김무력은 금관가야 왕의 아들, 신라에서는 가야 귀족들의 눈치를 보아서라도 그러한 제의에 응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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