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석에 앉아있던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2·13 합의는 초기단계의 이행조치를 담은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북한이 2·13 합의까지만 이행하고 그 다음 단계의 비핵화 조치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분명한 것은 그렇게 된다면 북한이 받기로 한 지원은 다 없어지고, 미국과 유엔안보리의 제재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4회 제주평화포럼 마지막 날 일정이 진행되고 있는 제주도 해비치호텔. 23일 오전에 '동북아 핵 도미노 관리와 NPT 체제의 미래'란 주제로 열린 '안보패널'에서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김태우 박사의 발표에 대해 버시바우 대사가 직접 '반격'에 나섰다.
"부시 정권이 초기엔 ABC, 지금은 NBC"
김태우 박사는 이른바 '핵 주권론'을 주장해 온 국내 핵 전문가. 그는 이날 발표에서 "현재 핵 게임을 보면 북한이 승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북한은 결국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지 않고, 최소한의 핵 능력을 보유하면서 미국과 협상해 나갈 것"이라고 현재의 협상구도에 회의를 표시했다.
그는 "북한은 지금까지 말을 잘 들어서 보상을 받거나, 말을 안 들어서 처벌 받는 두 가지 길 밖에 선택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미국과 협상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즉 부시 행정부는 처음에 "재처리를 하지 말라" 에서 "핵실험을 하지 말라"로, 다시 "핵확산을 하지 말라"로 2번이나 마지노선을 후퇴시켰다는 것. 또 '북한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다'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등 대북 3원칙도 다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이어 "부시 정권 초기에는 'ABC(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 정권과 모두 반대로 한다)'라고 했으나 지금은 'NBC(Nothing But Clinton. 클린턴 정권을 모두 따라 한다)'로 바뀌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미국측 참가자 "북한을 마지노선으로 돌려놓는 중"
그가 이렇게 대북 협상에 있어서 미국의 무원칙성을 주로 지적하자 미국측 참석자들이 차례로 반론에 나섰다. 먼저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에서 군축담당 고문을 맡았던 제임스 굿비 대사가 "2·13 합의는 9·9 공동성명의 첫 발을 내딛는 조치이며, 9·19 공동성명에는 분명히 핵무기 폐기를 담고 있다"면서 "핵무기 폐기 원칙이 2·13 합의에서 변했다고 보는 근거가 뭐냐"고 따졌다.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버시바우 대사도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영변 핵시설 폐쇄는 더 이상의 플루토늄 생산을 막는 것으로, 끝은 아니지만 중요한 달성"이라며 "미국은 마지노선을 포기한 게 아니라 북한을 마지노선으로 돌려놓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앞으로 북한의 기존 핵무기를 인정한 채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김 박사의 주장에 대해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결과"라고 일축하고, "물론 힘든 작업을 앞두고 있지만, 이란 핵 문제와 비교해 보면 그래도 해결 전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답변에 나선 김태우 박사는 "내가 2·13 합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평양을 다녀와서 2·13합의를 이행하겠다는 북한의 얘기를 전한 것을 반갑게 들었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9번째 핵 보유국이 돼버렸다"면서 북한이 50년 동안 공들여 개발한 핵무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고수했다.
다나카 전 심의관 "북한, 당장 핵폐기 결정 내리지 않을 것"
이날 안보 패널은 레온 시걸 미 사회과학원 동아시아협력국장의 사회로 김 박사 외에도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당시 대북협상의 막후 주역이었던 다나카 히토시 전 외무심의관, 중국 외교관 출신인 양쳉쓰 국제문제연구소장, 블라디미르 나자로프 러시아 안보회의 차장 등이 발표에 나섰다.
다나카 전 심의관은 북한이 과연 핵 프로그램을 완전 포기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해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대외적 위협이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하려 하지만 한편으론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외부 지원을 바라는 면이 있다"면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며 당장은 핵 폐기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냐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핵을 포기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을 유도해가야 한다는 것. 다나카 전 심의관은 이를 위해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첫째, 마지막 순간까지 포괄적 접근방안을 견지하는 것. 둘째는 6자회담의 나머지 5개 참가국이 연대해 일관된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6자회담 합의를 무효화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한국도 보다 강력한 정책을 취해야 하고, 상황 진전이 있으면 일본도 보다 진지하게 북한과 협상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핵 보유론'은 도미노 효과에 긍적적인가, 부정적인가
다나카 전 심의관은 이날 발표에서 북한 핵실험 직후 일본 내에서 불거졌던 '핵 보유론'에 대해서도 언급,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전문가들은 일본이 7~8개월이면 핵 억지력을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일본은 결국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핵 무장을 할 가능성 때문에 중국도, 미국도 북한 핵 문제를 더 진지하게 다루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핵무기 보유 논의가 나오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그의 논리는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양쳉쓰 중국 국제문제연구소장은 "북한 핵실험으로 모두가 걱정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 '도미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일본 자민당과 아소 다로 외상으로부터 우려할 만한 발언이 나왔다"며 "아베 신조 총리가 서둘러 진화했지만 일본 내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김태우 박사도 "일본은 농축시설과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고 있고, 70t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물론 이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것으로 보지만, 일본만 일방적으로 기술의 우위를 점한다면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계심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전 심의관은 "높은 수준의 일본 민간 핵 기술은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만드는 데 오히려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로 팽팽히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