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이 애 아느냐"며 책을 한 권 내민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라는 책이다.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이 서글서글하다. 잘 생겼다.
"너무 잘 생겼네."
"그런데 내가 이 애를 어떻게 알지?"
"왜? 선생님 동네 살았다던데. 부산 다대포."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부산에서 학교 나오고, 나이도 비슷하고, 우리 나이쯤 되면 대충 다 아는 사이다. 수학적으로 계산은 해보지 않았지만 무슨 일로 처음 만난 사람도 한두 사람만 건너보면 신기하게 다 안다. 부산이 넓다한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 셈이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본다. 그 나이면 우리 애하고 비슷하고 다대포에 살았다면 알만도 하지만 그 애는 5학년 때 전학 갔고 우리 애는 5학년 때 다대포로 이사 왔다. 그리고 아직 한두 명을 건너뛰지 않았으니 현재로선 모르는 사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상태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나는 책을 펼치게 되면 지은이, 펴낸이, 출판사 등이 작은 글자로 소개되어 있는 페이지를 먼저 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몇 쇄인지에 관심이 많다.
'2006년 5월 18일 초판 1쇄 펴냄'
'2007년 3월 5일 초판 37쇄 펴냄'
"아니? 1년도 안 됐는데 37쇄라!"
1쇄에 2천권을 찍는다 치자. 37 곱하기 2천 이것만해도 7만 4천 권. "짜슥, 돈 좀 벌었겠는데" "이제 부자라서 꿈조차 부자다고 이름을 바꾸어도 되겠는 걸"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구시렁거려 본다. 책을 내 본 사람은 다 안다. 우리나라에서 책 한 권, 한 권 팔리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인세로 소주 값이라도 기대해 보았다면 37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걸 지극히 실감한다. 그런 감동 아닌 감동을 가지고 책장을 넘겼다.
자질은 타고 난다
이 책은 저자인 김현근군의 프린스턴 대학 입성기이다. 그는 월수입이 60만 원도 채 안 되는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을 펼칠 수가 없었으나 마침 그때 생긴 부산의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하면서 꿈을 펼쳐간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종류의 책 저자들은 대체로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다. 현근군이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하버드 최우수 졸업기 <7막 7장>의 홍정욱씨도,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장승수씨도, <공부귀신>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 필즈상을 받은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에서도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 삼각함수 한 문제를 2주일 동안 다른 공부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밥 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도 이 문제를 푸는데 열중하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것만 생각하다 전봇대에 머리가 부딪혀서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현근군은 말한다. 중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사생대회 겸 소풍을 갔을 때 일이었다. 그때 반장이었던 그는 자기 도시락과 담임선생님의 도시락을 함께 싸갔는데 그림의 대상이 될 사찰과 풍경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림 그리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두 개의 도시락 모두 집에 가져왔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오랜 교사 경험으로는 이러한 특성은 타고 난다. 내가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는 자질론보다는 환경론이 나를 지배했다. 교육학 교수님들이 항상 그렇게 가르쳤듯이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든 하버드대든 다 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나 역시 사람들의 자질은 비슷한데 부모가 가난하다든지, 바쁘다는 등 교육환경이 나빠서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자질론으로 생각이 많이 바꿨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박찬호처럼 공을 잘 던질 수 없고 박찬호 역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책의 저자인 현근군처럼 공부 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공부든 운동이든 소질과 특성을 고려해야 하고 적재와 적소가 필요하다.
과외나 학원이 만능이 아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을 봐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학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겨우 초등학생을 학교를 마치자마자 영어학원, 수학학원, 그것도 모자라서 영어 과외, 수학과외, 과학과외까지 받고 밤 12시가 넘어 녹초가 되어서 돌아오는 경우다. 그는 "단언하건대 이런 학생들 중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매우 정확한 분석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글자를 배울 때 공부란 과자처럼 맛있는 것이라며 글자가 새겨진 과자를 준다고 한다. 공부란 이렇게 시작해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에 지나치게 부담을 주면 재미는커녕 공부에 질려 학업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학원은 특성상 아무래도 선행학습을 많이 한다. 미리 공부를 해 버리면 저학년 때엔 학교 수업시간에 대충 들어도 좋은 점수가 나온다. 그런 버릇이 들면 고학년이 되었어도 수업시간에 공부를 대충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우리 집 아이의 한 친구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내가 보기에도 너무 심하게 과외에 의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Y대 의대가 목표라면서 과외를 자랑하는 엄마에게 지나친 공부의 부작용을 얘기해 줄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의 표현으로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대충 듣는 둥, 부작용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업계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실업계고등학교는 본의 아니게 공부를 못해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머리가 아니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노력이라는 것,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실패자나 하는 일이라는 것,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자에게 확률은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성공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은 젊은이가 가져야 하는 좋은 생각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다. 이 책의 37쇄는 글 덕분도 있지만 이 땅의 부모들과 학생들이 공부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측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현실을 정확히 파악했다면 아마 그 불안과 초조를 해소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