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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졸업식이 거행된 JMU 컨보케이션 센터.
ⓒ 한나영

"우리는 얼굴이 다르고 인종과 국적도 서로 다르지만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왔습니다. 앞으로 진학을 하건 사회로 진출하건 우리는 서로 돕고 헌신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난 9일 미국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에 있는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졸업식장. 인근 제임스메디슨 대학교 컨보케이션 센터를 빌려 거행된 졸업식에서 학생회장인 얏시 피루즈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의젓하게 환영사를 하고 있다.

2월에 졸업식이 열리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고등학교에선 5월부터 6월 사이에 졸업식이 거행된다. 형식이나 내용이 한국과는 많이 다른 미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 졸업생 대표와 연설을 하게 될 선배만 단상에 서 있다.
ⓒ 한나영

단상에는 졸업생 대표와 선배만 앉아

한국에서는 졸업식이 거행되는 단상에 대개 높은(?) 분들이 앉는다. 교장 선생님, 동창회장, 학부모 대표, 교육청 관계자나 국회의원, 시의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얼마나 귀하신 몸이 출현하는가에 따라 졸업식의 격이 결정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졸업생보다는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축사에 초점을 맞춘 졸업식이 진행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곳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와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선배만이 단상에 앉아 있었다. 먼저 식순을 살펴보자.

►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제 113회 졸업식 ◄

▪ 축하연주 :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 밴드부
▪ 환영사 : 얏시 피루즈(학생회장)
▪ 합창공연 : 폴 사이먼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아너스 합창부
▪ 회고사 : 엘리 위버(12학년 회장)
▪ 개회사 : 캐이틀린 존슨(차석 졸업자)
▪ 고별사 : 에반 바우(수석 졸업자)
▪ 초청 연사 소개 : 얏시 피루즈(학생회장)
▪ 초청 연사 특별 연설 : 모건 홀(1998년 졸업자)
▪ 졸업장 수여 : 아이린 레놀즈(교장), 마이클 아이, 제레미 냅, 제이 섭코(교감), 에이미 파워즈(카운슬러 대표), 단 포드(교육장), 팀 레이시(선출 교육위원)
▪ 졸업 인정 및 감사의 말 : 아이린 레놀즈(교장)
▪ 퇴장 : 밴드부 주악


졸업식 주체는 졸업생

순서에도 나와 있듯이 졸업식은 철저히 졸업생 중심이다. 모든 순서를 졸업생이 맡아 진행하고 연설도 졸업생이 한다. 한국의 고3에 해당하는 18살인 12학년 졸업생들의 연설문에 귀를 기울여보자.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님들께 오늘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합시다.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그분들에게 주었던 상처에 대한 용서를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또한 그분들께 표현합시다." (12학년 회장 엘리 위버의 회고 연설)

"우리의 인생에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용기와 도전정신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이 꾸어왔던 꿈을 향하여 달려 나가세요. 제 손가락을 엇갈려 여러분의 행운을 빌어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일을 하십시오. 또한 하고 있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차석 졸업자 캐이틀린 존슨의 개회 연설)


졸업식장에서 많이 들었던 어른들의 판에 박힌 식상한 연설 대신 졸업생 대표들이 들려주는 연설은 신선하다. 명문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수석졸업생 에반 바우는 짧지 않은 연설을 원고 한 번 보지 않은 채 발표해 천재소리를 듣는 진가를 확인해 주기도 했다.

"슈퍼 영웅처럼 꿈을 꾸십시오. 여러분이 꿈을 꾸고 있는 한 여러분은 모두 영웅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십시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을 균형 있게 사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탁월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수석 졸업자 에반 바우의 고별 연설)

고등학생이라면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젓한 생각과 아름다운 문장은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하고 감동을 주기도 했다.

특별히 이날 연설 가운데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선배인 모건 홀이 들려준 연설이었다. 1998년 해리슨버그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건 홀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는 뉴욕의 공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제가 하버드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저의 가정에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암에 걸리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시한부 인생이 선고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딸의 졸업식을 보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하버드대학에 다니는 딸이 자부심이자 보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졸업하는 졸업식장에 직접 와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졸업식 참석은 어머니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런 목표가 어머니의 생존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제 졸업식에 참석하실 수 있었습니다.

목표는 이렇게 위대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삶을 연장시켜 주고 삶에도 활기를 줍니다. 여러분, 목표를 세우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세운 목표가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해줄 것입니다."


졸업식장에 모인 졸업생들뿐 아니라 축하객들에게도 진한 감동을 주었던 20대 아가씨의 명연설이었다.

▲ 감동적인 연설을 들려준 하버드대학 졸업생 모건 홀.
ⓒ 한나영

선생님들도 기립박수 받아

그렇다면 졸업식에서는 졸업생들만 박수와 주목을 받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을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박수와 격려를 받는다.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 교장 선생님과 학과 선생님들은 졸업식장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 이들은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졸업 가운을 입고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자신의 출신대학을 나타내는 고유한 빛깔의 후드를 두른 형형색색의 가운이다.

▲ 형형색색의 졸업가운 후드를 두른 선생님들.
ⓒ 한나영

▲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는 교장 선생님과 졸업생들을 축하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교감 선생님, 교육장, 교육위원, 카운슬러 대표.
ⓒ 한나영

졸업식이 시작되면 교장선생님을 필두로 선생님들이 입장한다. 바로 이때 식장에 모인 학부모들과 축하객들은 모두 일어나 수고하신 선생님들을 향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 졸업식장에서 담임선생님 얼굴이나 겨우 볼 수 있는 우리네 졸업식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선생님들의 입장이 끝나면 졸업생들의 입장이 시작되는데 이것도 아주 볼만하다. 졸업생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내면 스탠드에 앉아있던 가족이나 축하객들은 일어서서 졸업생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하고 나팔을 불기도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떤다. 졸업식장에서 눈물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흥겹고 유쾌한 한 편의 이벤트가 연출되는 곳이 바로 졸업식장이다.

▲ 아는 선배 이름이 호명되자 벌떡 일어나 환호하는 후배들.
ⓒ 한나영

졸업식장의 하이라이트

모든 연설이 끝난 뒤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졸업장 수여가 시작된다. 이때 비로소 교장 선생님과 세 분의 교감 선생님, 교육장, 교육위원과 카운슬러 대표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이들은 나란히 서서 교장선생님이 처음 건네준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졸업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졸업생들을 축하해준다. 졸업생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졸업장을 받는다. 이때도 가족들과 친구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일어서서 요란한 세리모니를 벌이기도 하고 나팔을 불기도 한다.

▲ 가족,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
ⓒ 한나영

졸업장 수여가 끝나면 교장선생님의 짧은 감사 인사말이 있고 졸업생들의 학사모 던지기가 이어진다. 이제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뿌듯함과 자유로움 때문일까. 졸업생들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악수를 건네기도 한다.

마침내 자유!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은 퇴장하면서 가족들을 찾아 사진도 찍고 즐거워한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학생이나 섹시한 드레스에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여학생들의 패션은 대단한 눈요기 거리다. 마치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것 같은 꽃다운 청춘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저 눈이 부실 따름이다.

▲ 한껏 멋을 부린 여학생들. 가운데 세 명은 이 학교 뮤지컬 스타들.
ⓒ 한나영

졸업식이라고 해봐야 별 감동 없이 잡담하면서 TV로 중계되는 무덤덤한 화면만 주시하는 우리네 졸업식.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이곳 미국 고등학교의 졸업식은 순서 하나하나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한국에도 졸업생 모두 한자리에 모여 교장 선생님이 졸업장을 수여하고 악수를 건네면서 축하해주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지만 극히 일부의 사례일 것이다.

졸업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데 멋진 새 출발을 위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졸업식을 치를 수는 없을까. 미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 졸업식에는 온 가족이 총출동한다. 조부모, 외조부모, 증조부모까지 출동한 가족도 있었다.
ⓒ 한나영

#해리슨버그 고교#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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