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노조는 졌다. 1년 동안의 파업과 길거리 투쟁에도 불구하고 얻은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기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기로 했으니 버티기로 일관한 경영진의 명백한 승리다.
닮아있다. 30여 년 전에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있었고, 30여 년 후엔 <시사저널> 노조가 있다. 30여 년 전엔 "자유언론 수호"를 외쳤고, 30여년 후엔 "편집권 독립"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선후배 기자 모두가 길거리에 내몰렸다.
모두 졌다. 과거의 싸움도 졌고 현재의 싸움도 졌다. 이게 한국 언론사의 단면이다.
그렇다고 사초의 표지를 덮을 일은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이으면 의미가 형성되고 지향점이 드러난다.
아무도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자유언론 수호투쟁'을 영원한 패배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모태가 되어 <말>이 나왔고, <한겨레>로 이어졌다.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줄기가 서면 가지가 뻗고, 가지가 성하면 잎이 피고 지는 건 일상이 된다.
줄기는 이미 서있다. 자유언론에서 독립언론으로, 언론자유 쟁취에서 편집권 독립으로 구호는 달라졌지만 맥은 하나다. 가지도 성하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옆에 <시사저널> 노조가 곧게 뻗어있다. 그럼 된 일이다. 잎이 진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다.
아쉬워한다고 한다. 새 매체를 창간하기로 한 <시사저널> 기자들이 18년간 소중히 갈고 닦은 제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한다고 한다.
인지상정이지만 매달릴 일은 아니다. 한국 언론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더 잘 만들면 될 일이다.
뱉고 나서 보니 말에 어폐가 있다. 비교격을 사용하는게 원천적으로 무리다. 죽은 자와 산 자는 경쟁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되지 않는다.
걱정을 감출 수 없는 대목도 있다. 주간지 시장이 정점을 지나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게 일반적 진단이다. 더구나 <시사저널> 노조의 편집권 독립투쟁 배면에 자본이 있었다. 광고주가 곱게 보아줄 리 만무다.
고려대상임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낙담거리로 격상시킬 필요는 없다. 괜한 낙관이 아니다.
<말>지가 만들어질 때는 5공의 폭압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편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인쇄소와 유통망에 대한 상시적인 사찰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겨레>가 창간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과 비교하면 보수언론의 카르텔이 훨씬 더 견고하고 폐쇄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도 뚫었다. 추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였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말>을 전달하던 손, 돼지저금통과 꼬깃꼬깃한 지폐를 국민모금함에 넣던 고사리 손과 솥뚜껑 손, 이것이 추동력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사저널> 노조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뜨고, 새 매체 구독을 자청하는 댓글이 줄줄이 이어진다.
다시 한 번 독자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