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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개혁반대 목소리는 그저 당당하기만 하다. 그들의 논리는 분명 모순되지만, 또 어떻게 들으면 그럴싸하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 관점을 갖게 되면 수구세력의 개혁반대 논리가 얼마나 궤변인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수구세력의 논리가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것 같지만, 사실은 모순과 억지로 가득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역사적 실례가 있다. 바로 송나라 수구세력 사마광(1019~1086년)의 사례다.
지난 23일 토요일에 <송사> 식화지(食貨志)를 소재로 열린 어느 중국사 세미나에서 토론된 사마광의 궤변을 들어보기로 한다. 참고로, 식화지란 중국 각 왕조의 산업과 경제정책을 다룬 내용으로서 각각의 중국 정사(正史)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자치통감>이란 역사책의 지은이로 잘 알려져 있는 사마광은 송나라(북송, 960~1127년)의 역사가·정치인으로서 제6대 군주 신종(재위 1067~1084년) 때에 한림학사·어사중승에 이어 추밀부사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이처럼 신종에게 은혜를 입은 그가 희령 4년(1071) 4월에 신종에게 사표를 던지고는 낙양으로 내려가 버렸다. 개혁적 열의에 가득한 스무 살의 젊은 황제 신종이 왕안석(1021~1086년)을 내세워 신법(新法)이라 불리는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신종은 지방관이던 왕안석을 참지정사로 발탁하여 국정개혁 전반을 맡겼다. 사마광은 바로 그 점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신법개혁은 주로 국가재정을 확충함과 함께 농민과 중소 상인을 육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신법의 내용인 균수법·모역법·보갑법·보마법·삼사법·시역법·청묘법·농전수리법·방전균세법 등은 기본적으로 국가재정과 서민경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히 구법당이라 불리는 수구세력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종에게 요직을 제수 받은 사마광이 스스로 사표를 던진 것은 자신을 포함한 기득권세력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입장에서는 개혁 자체도 불만스러웠지만, 무엇보다도 그 개혁의 주역이 특히 싫었다. 남방 출신인데다가 입만 열면 서민을 염려하는 '꼴불견' 왕안석이 개혁의 주역이라는 사실이 싫었던 것이다. 신종 즉위 이전만 해도 송나라의 국정은 북방 출신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사마광도 북방 출신이었다.
또한 사마광은 왕안석보다 2살 위였다. 같은 연배의 신진관료에 대한 일종의 경쟁심도 작용한 것이다. 예전에는 나이 많은 원로들의 보수적 성향을 공격하던 그가 신종 시대에 철저한 반개혁주의자로 돌변한 것은, 왕안석에 대한 경쟁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광이 한때 보수적 원로들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득권에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아무튼 사마광은 신법개혁이 싫었고 왕안석도 싫었다. 그래서 요직도 마다하고 낙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중앙에서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왕안석도 사정이 편치만은 않았다. 수구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개혁이 막 시작되던 희령 2년(1069)에는 여회라는 인물이 "왕안석은 천자에게 강론할 때에 앉아서 강의한다"며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비록 신하일지라도 어린 군주에게 강의할 때에는 스승으로서 앉아서 가르치는 게 당연한데도 그런 비판을 가한 것이다.
이때는 같은 수구세력인 사마광도 "너무 터무니없는 비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여회 자신도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또 직접 사마광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 왕안석을 빗대서 비판한 <변간론>이라는 괴문서에서는 "왕안석이 소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위선자라는 증거"라고 비난했다. 이후 이 <변간론>은 왕안석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어떤 반대파들은 "개혁을 하면 좋겠지만 잘못하면 지금보다도 더 나빠질 수 있다"면서 개혁을 반대하기도 했다. 송나라 수구세력들의 논리가 얼마나 빈약했는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 될 것이다.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비판을 못했던 것이다.
그럼, 사마광은 어떻게 비판했을까? 사마광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왕안석의 지위가 확고할 때에는 별다른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왕안석이 잘 나갈 동안에 그는 낙양에 내려가서 <자치통감>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사마광이 중앙에 복귀한 때는 왕안석이 지방직인 강녕지사로 내려가고 개혁군주 신종이 죽은 뒤였다(1085년). 수구세력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는 중에 총 7번의 사표를 쓴 적이 있는 왕안석은 결국 희령 8년(1075)에 지방으로 내려가서 다시는 중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개혁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앙 정치에 염증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종의 후계자인 어린 철종(재위 1085~1099년)을 대신해서 권력을 잡은 선인태후는 본래 신법개혁을 싫어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종이 죽자마자 사마광을 포함한 구법당을 중용하여 신법을 아예 뿌리 뽑으려 했다.
이때 중앙에 복귀한 사마광의 건의서 하나가 <송사> 식화지에 수록되어 있다. 건의서의 취지는 개혁을 뿌리 뽑고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건의서의 서두는 농민들을 걱정하는 말로 시작한다.
"사민(四民) 중에서 유독 농민이 가장 힘듭니다. 추울 때에 토지를 갈고 더울 때에 김을 매고, 몸은 땀으로 적시고 발은 흙투성이가 되며, 해를 (머리에) 이고 일을 하며 별을 (머리에) 이고 쉽니다."
여기서 "해를 머리에 이고 일을 한다"는 것은 해가 떠 있는 동안 농민들이 하루 종일 고되게 일을 한다는 말이다. 서민경제를 위한 신종과 왕안석의 개혁에 반대해서 15년씩이나 지방에 칩거해 있던 사마광은 이처럼 서민을 걱정하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의중을 감추고자 하였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는 왕안석의 신법을 조목조목별로 비판했다.
"면역법은 가난한 백성들을 각박하게 만들고 건달들을 먹여 살리는 제도입니다."
면역법은 과중한 요역으로부터 농민의 부담을 덜기 위해, 면역전을 납부하면 요역을 면제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농민 입장에서는 1년에 최소 1개월 정도 요역을 하느니 차라리 적당한 금전을 내고 요역을 면제받는 게 더 유리했다. 그런데 사마광은 가난한 백성들로부터 돈을 거두는 제도라며 면역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건달들'이란 면역전을 거두는 일을 맡았던 이정(里正)들을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보갑법은 농업도 아닌 일에 힘을 쏟도록 만듭니다."
보갑법은 농민들을 조직해서 치안조직을 구성하는 제도로서 군사비를 절약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다. 직업이 농민이라도 공동체의 치안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보갑법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군사비의 증대로 인해 어차피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사마광은 농민을 농업 아닌 일에 동원했다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5년간 낙양에서 <자치통감>을 쓰는 동안, 예전에 수구세력이 농민들을 숱한 요역 등에 징발했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만 걸까.
"청묘법은 강제로 빌려주고는 무겁게 거두는 제도로서, 묵은 쌀을 빌려주고 햅쌀을 받는 제도입니다."
청묘법이란 봄이나 가을에 농민에게 저리로 쌀을 빌려준 뒤에 가을이나 이듬해 봄에 되돌려 받는 제도였다. 강제로 빌려주었다느니 무겁게 되돌려 받았다느니 하는 것은 억지주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빌려주는 쌀은 당연히 묵은 쌀일 수밖에 없고 수확기에 되돌려 받을 때에는 당연히 햅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부에 비축된 쌀은 당연히 묵은 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마광은 정부가 묵은 쌀을 빌려주고 햅쌀로 돌려받았다면서 신법의 정당성을 부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주장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사마광의 주장도 조정에서 호응을 받았던 모양이다. 신법당이 몰락하고 구법당이 부활한 철종 초기의 정치적 지형 속에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도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논리도 사마광의 논리처럼 어이없고 황당한 주장인 경우가 많다. 수구세력도 입만 열면 서민과 국민을 운운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는 점은 사마광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일부 국민들이 수구세력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개혁적 발언이라고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은, 철종 즉위 직후의 정치상황처럼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수구세력들이 권력의 중요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구세력의 권력이 수구세력의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수구세력과 무관한 후대의 사람들이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논리를 들으면, 오늘날 우리가 사마광의 논리에서 느낄 수 있는 그 ‘터무니없음’을 너무나 명료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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