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23일) 오후. 바닷바람이라도 쐬면 좋을 듯싶어 바닷가로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놀러온 조카네 가족과 함께 했다. 모처럼 찾아온 손님들한테 강화 구경도 시켜주고, 더위도 피해볼 요량이다.
벌써 여름의 한복판인가?
목적지는 동막해수욕장. 동막해수욕장은 우리 집에서 차로 20여분 가는 가까운 거리이다. 마니산을 가로 지르는 매내미고개를 넘어가기로 했다. 고개에 이르자 녹음이 우거진 숲속이 그림 같다.
"강화에 이런 고개가 있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운전을 하는 조카가 에어컨을 끄면서 차창을 내린다. 숲에서 뿜어 나오는 신선함이 상쾌하다. 애들도 싱글벙글 좋아라한다. 구불구불한 숲길을 달리는 기분은 강원도 한계령이라도 넘는 듯싶다.
해수욕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서자 도로에 차량들이 빼곡하다. 한여름의 해수욕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다. 물이 멀리 빠진 개펄에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조카가 몰려든 인파를 보고 딴 생각을 한다.
"이거 바다구경이 아니라 사람구경하게 되었네. 가볍게 산행이나 하죠?"
"산에 오를 복장이 아니잖아! 그리고 애들 데리고 어떻게 산을 타니?"
정수사 오르는 길은 걸어야 제 맛
수많은 인파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 호젓한 산길이 좋을 듯싶다. 어디가 좋을까?
"아! 좋은 데 생각났다. 정수사로 가자!"
"정수사요? 정수사라는 절은 처음 듣는데."
"법당이 멋들어져. 무엇보다도 대웅보전 꽃살문이 무척 아름답지!"
"가는데 힘들지 않죠?"
약간 가파르지만 포장된 길이라 애들도 걷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예정에도 없는 정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여러 차례 와본 적이 있는데, 여름철에는 처음 찾는지라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수사는 동막해수욕장에서 전등사 쪽으로 가다 보면 안내 표지가 나온다. 조그만 산길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된다. 절의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강화에 있는 천년 고찰인 전등사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알려진 보문사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정수사는 이름만큼이나 정갈한 산사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절 들머리부터가 아름답다.
"산길이 너무 좋지?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갈까?"
우리는 아이들 손을 잡고 산길을 걷기로 했다. 호젓한 산길을 걷는 재미가 편안하다. 애들도 팔짝팔짝 뛰어가며 좋아라한다. 그래도 가파른 길을 오르자니 등줄기에선 땀이 흥건하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녹음의 푸르름이 섞여 신선하기가 그지없다.
아름다운 꽃살문이 있는 정수사 대웅보전
구불구불 돌아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기자 어느새 정수사 안내 표시석이 보인다. 정수사에 오르는 돌계단이 고즈넉하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정돈되어 보인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회정정사가 창건하였다. 불자들이 수행 정진하는데 좋은 자리라하여 정수사(精修寺)로 하였다. 조선 세종 5년(1423) 함허대사가 절을 중수한 후,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하고 정수사(淨水寺)로 바꾸었다.
맑은 물이 솟아난다는 정수사.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가? 그런데 생각보다 흘러나오는 약수의 양이 적다. 물맛도 미지근하다. 그간 가뭄이 들어서인가? 하지만 한참을 걸으며 느낀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정수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면 3칸, 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는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툇마루를 후대에 늘렸음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분합문의 꽃살문이다. 문살을 여러 개의 나무로 조각하여 붙인 것이 아니라, 널판에 정성스레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방금 채색한 듯 모란과 연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오른다. 마치 살아있는 모란과 연꽃을 화병에 꽂아놓은 것 같다.
한 다발의 꽃을 화병에 담아낸 장인은 어떤 마음으로 문살을 새겼을까? 자신의 혼을 불살라 법당의 최상의 장엄함을 살리면서 자신의 소원을 담아내지 않았을까? 그 소원이 뭐였을까 자못 궁금하다. 꽃살문의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다.
정갈해서 좋고, 호젓해서 좋고
대웅보전 왼쪽 바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석탑이 눈에 띈다. 원래는 법당 앞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몇몇 사람들이 석탑에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빈다.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분들이 나누는 대화가 여유롭다.
"내가 뭐랬어? 정수사 오길 잘했지?"
"사람들이 크게 붐비지 않아 절속은 절속이네."
"화병에 꽃을 꽂아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려는 마음이 담긴 꽃살문은 어땠고!"
"정수사의 맑은 물을 마시니 마음까지 깨끗해진 것 같잖아."
정말 정수사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이 즐거우니 마음까지 즐겁다.
한참을 그늘에서 쉬니 땀이 식는다. 아주 작은 새들이 오가며 청아한 목소리로 지저귄다. 조요한 산사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몸과 마음이 가볍다.
천천히 오던 길을 다시 걷는다. 함께 내려오는 사람들 모두 얼굴에 화색이 돈다. 조카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좋은 데 안내해줘 고마워요. 정갈하고 호젓해서 참 좋네요. 마니산은 기(氣)가 세다면서요? 다음엔 마니산 참성단까지 함께 올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