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별꼴을 다 본다. 6·29선언은 항복선언이 아니라고 한다. "현명한 선택"이었고 "용기"였다고 한다. 조·중·동이 전하는 내용이다.
분명히 하자. 조·중·동은 주장하지 않는다. 전할 뿐이다. 6·29선언 20주년을 맞아, 그리고 김용갑 의원이 주최하는 '6·29선언에 대한 역사적 평가' 토론회에 즈음하여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동아일보)"을 전하고 "엇갈린 평가(중앙일보)"를 전할 뿐이다.
그럼 누굴까? 6·29선언은 항복선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굴까?
아니나 다를까, 당시 정권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해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 이병기 당시 민정당 총재보좌역 등이다. 주장하는 바도 같다.
누가 6·29가 항복선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민주화 세력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 민심을 읽고 최악의 강경책을 유보한 (것)" - 노태우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것" - 박철언
"국민의 요구를 정책적 대안으로 선택(한) 것" - 김용갑
"국민의 열망인 직선제를 받아들인 태도" - 이병기
이들이 이런 수사를 통해 새기고자 하는 건 능동성이다. 떠밀려 받은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또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6·10항쟁과 6·29선언(은)…두개의 동테(바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 노태우
"6·10과 6·29는 모양을 달리하는 일란성 쌍둥이" - 박철언
이들의 주장에 일일이 논박하는 건 소모적이다. 20년간 정립한 역사적 평가를 후퇴시키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최대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자.
논박의 근거는 <조선일보>에 제시돼 있다. 4·13호헌조치가 있었고, 6월 항쟁의 서막을 연 6월 10일에 노태우씨가 민정당의 간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6월 18일에는 전두환씨가 군 출동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세 개의 상징적인 사실에서 확인되는 건 완전 별개였다는 것이다. 당시 정권은 민심의 흐름과 따로 갔고, 국민의 요구와 별도로 움직였다. 민심을 읽고 양보하려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전 단계, 즉 국민에 다가가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6·29선언은 반전이며, 반전의 동기는 가파르게 상승하던 6월항쟁 열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6·10과 6·29는 두 개의 (좌우)바퀴도, 일란성 쌍둥이도 아니다. 전륜구동 자동차의 앞바퀴와 뒷바퀴이며,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다.
피를 보지 않고 평화적으로 국민 요구를 수용했으니 민심을 수용하고 국민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씨가 특히 강조한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다.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총칼로 뭉개면 국민은 엎드린다는 전제,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집권세력이 민심을 수용하고 국민을 포용한 것이라는 독선이 깔려있다. 정치군인다운 발상이다.
이쯤 해두자. 더 긴밀히 짚을 게 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수학자들이다.
시대가 변하면 6·29도 달라진다?
박효종·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이 나선다. 6·29선언은 "민의에 순응한 현명한 선택(박효종)"이었다며, "당시 국민과 정권의 상호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현 정권과 정치권이 새겨야 한다(이영훈)"고 말한다 .
배우라고 한다.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새기라고 한다.
처음 듣는다. 박종철·이한열 군이 죽어나가고, 20일간 시위가 전개되고,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최루탄에 눈물 콧물 흘리며 연행되는 과정이 "대화와 타협의" 한 과정이라는 얘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다.
처음 듣는 얘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강경근 숭실대 교수가 나서 일갈한다. "6·29를 항복선언으로 보기 때문에 현 정권과 정치권이 6·29선언의 산물인 현행 헌법은 무시해도 된다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과문한 탓인지 생소하고 생경하게 들린다. 20년의 시대변화상 때문에 현행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항복선언이니까 헌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아무튼 이런 주장 탓에 "현 정권과 정치권"은 오만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되게 생겼다. 이른바 "6·29선언 주역"을 깔아뭉갬으로써 민주화 세력의 독선 과잉이 빚어졌고, 현재의 극단적 정치대립상황은 그에 말미암은 측면이 큰 셈이 됐다. 6·29선언 재조명의 끝은 이렇다.
이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달에도 가치 판단이 작용한다. 사실의 가치 평가에 따라 전달과 묵살이 엇갈린다. 조·중·동은 왜 전한 것일까? 도대체 어떤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