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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동무 한 명과 과자를 훔치려고 계획을 세웠다. 한 명은 주인과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한 명은 과자를 가방에 넣기로. 긴장 속에 행한 작업은 성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이렇게 본능을 자극하여 훔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굶주림>을 읽으면서 9살 그때를 기억나게 했다. 문제는 배고픔이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면 굶주림으로 진화한다.

굶주림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북한의 어린이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자연재해를 당한 지역의 아이들'의 일상은 어쩌면 굶주림의 자기 증명이다. 그들을 통하여 증명되는 굶주림은 일상이며, 인생살이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인간이, 인간이 아닐 수 있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굶주림이 일상화되었을 때,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굶주림>은 물론 이런 거창한, 지구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굶주림을 고발하고 있지 않다. 한 인간이 한 글쟁이의 일상을 통하여 굶주림을 그리면서 그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주고자 한다.

한 글쟁이가 있다. ‘글쟁이’ 그래도 조금은 인간답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한 인간 아닌가? 약간은 고상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그가, 굶주림 앞에서 "초등학생이 푼푼이 모은 부스러기 돈이 길바닥에 떨어지고,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남은 한 푼이라도 가로채고 싶을" 정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굶주림은 '고상한 척' 하는 한 인간이 식욕이라는 본능 앞에 굴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식욕을 채울 수 없기에 잠자리까지 위협받는 현실, 남은 옷가지까지도 벗어주어야 하는, 인간이 가진 성욕이라는 본능까지 통제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 그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스스로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가 속한 사회는 개인적 굶주림에 관심이 없다. 이 시대 우리가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당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결과는 뻔할까? <굶주림>은 쉽게 말하지 답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조끼까지 전당포에 맡겼다. 하지만 그는 이상했다. 굶주림이 과했던 것일까? 굶주림 앞에 굴복한 것일까? 아니면 식욕이라는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여 본능을 다스리고, 본능에 영원히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한 것일까? 거지 노인에게 적선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산 속에 들어가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것을 본능으로 생각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식욕이라는 본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 군상들과 동무하며 함께 하는 공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만 굶주림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적선으로 굶주림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글쟁이, 선원, 동무를 만나 10크로네, 1크로네, 2외레 하면서 먹는 것에 끊임없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자유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인간'을 알 것 같다.

글쟁이로 인생살이를 연장시키기 위해 양초를 외상으로 사기 위하여 갔지만 멍청한 점원 때문에 횡재를 하고 비프스테이크를 마구 먹고, 웨이터에게 적선한다. 굶주림이 보여주는 생래적인 반응인 토함으로 그가 얼마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인지 나타내고 있다. 양심과 고상함, 본능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 그는 고민하지만 가난한 노파에게 적선으로 마무리한다.

과연 그는 적선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음인지 점원에게 찾아가 자신이 훔쳤다고 오히려 호통친다. 재미있는 인생살이의 증명이다.

굶주림은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다. 그는 굶주림의 주관을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면서 객관화시키고 있다. 왜 그럴까? 글쟁이라는 고상함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는 언듯언듯 반응한다. '춥지 않다고,' '배고프지 않다고' 거짓말이다. 배고프면 고픈 것이고, 추우면 추운 것이다. 3자가 보기에 그는 춥고, 배고프다. 3자에게 배고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도 고상함을 뭉개는 것일까? 그냥 배고프다고 외치면 된다. 왜 배고픔, 아니 배고픔이 진화한 굶주림이 사실이니까?

배부른 돼지가 되기 싫다는 이들도 있지만 어쩌면 거짓일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 고상함을 쫓다가 일상과 식욕이라는 본능을 무시한다. 사실 그런 이들은 식욕이라는 본능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굶주림, 아니 배고픔도 모르는 고상한 인생살이들이기에. 배부른 돼지가 되기 싫다는 배부른 후에 할 수 있는 말임을 우리는 <굶주림>과 북한의 어린이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하리라.

그리고 그가 하는 말 "친절한 하나님, 나를 왜 이다지도 못살게 하십니까? 나는 이 비참한 삶에 완전히 지치고 말아 더 이상 싸워 나갈 의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속옷도 갈아입지 못하였습니다." 굶주림이 진화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절박함에 대한 호소일지라도, 예수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외친 말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와 동일할 수 없다. 그가 경험하는 굶주림은 어쩌면 자기 내면 속에서 스스로를 굶주림 속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글쟁이, 우연히 얻은 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주관적, 본능적 굶주림을 다른 이들에게는 증명하지 않고, 자기는 조금은 고상하여 다른 이들에게 은택을 베푼다. 그가 할 일인가 존경의 대상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리라. 식욕의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가 정말 다른 이들을 향한 고상한 나눔이 존경받을 만 한가? 그렇지 않다. 이유는 자신은 끊임없이 배고파하고,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값어치가 반 푼어치도 없는 '단추' 하나에 목숨을 걸고, '대팻밥'으로 정신의 몽롱함에서 잠깐의 자유를 얻기에. 본능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결정이다.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을 비난하고 참다운 인생살이가 아니라 말하는 것은 본능을 채운 자들의 고상한 논리일 뿐이다. 본능을 채우지 않는 사실 본능을 통제하기 어렵다. <굶주림>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생군상들은 고상함과 굶주림을 동일함으로 보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굶주림이 나를 지배할지라도 고상하면 인간답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부름을 경험한 자들은 굶주림에 찌든 자들에게 제발 좀 고상해져라 말한다. 이에 반대한다. 과연 그럴까? 배부름으로 뱃속에 가득 채워진 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말은 굶주림이 가져다 주는 본능의 쇠약함을 경험하지 않고, 고상함을 논할 수 없다. 본능에 충실한 자, 그리고 그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정말 인간일 수 있음을.

덧붙이는 글 | <굶주림> 크누트 함순 저 | 범우사


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창(2011)


#굶주림#크누트 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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