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다.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여러 의미에서 정말로 멀리에 사는 사람이었다. 이제 나와는 일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관심분야가 다르다. 꾸는 꿈이 다를 뿐 아니라 만나는 일도 없다. 꼭 가야 할 만한 사람의 부고나 받으면 만나게 될까?
그런 사람이 만나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 같이 한번 만나자'고 말이다.
그 '옛날 사람들' 이름을 대는데 줄줄이 이 책에 나오는 이름들이다. 양*조, 김*선, 송*평, 유*우, 서*화, 박*배, 유*희, 홍*표….
싱싱하게 빛나던 그때의 젊음은 세월의 파고를 타고 넘어 이제 "개 한 마리 잡아놓고 소주잔이나 한잔씩 하자"로 전락했는가? 정녕 그때의 '젊음'은 단지 생물학적 연령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을 통사적으로 개인의 운동가적 삶에 맞춰 기록한 책이 지난달에 나왔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이다. 저자는 1958년생인 황광우. 광주일고 3학년 때인 1976년, 유신독재 반대시위로 제적되었다가 서울대 경제학과 1학년 때 다시 시위 주도혐의로 강제 징집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987년 6월 항쟁까지 굴곡 많은 개인사를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녹여 낸 기록물이 바로 이 책이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가는 기차여행처럼 이야기는 당시의 6월 현장으로 독자를 생생하게 안내한다. 저자 자신이 직접 겪고 본 것만을 적고 있는데 당시 폭압적인 군사독재 아래서 한 젊은이가 겪는 고뇌와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 이야기가 긴장감 있게 전개되어 있다.
저자의 친구들이 새벽이슬처럼 맑게 빛나면서 목숨을 민주화의 제단에 바치는 대목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저자 특유의 물처럼 흘러가는 빼어난 문장들이 책 읽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과 박종철 고문학살사건, 황정하 투신사망사건, 경동산업노동자의 집단분신사망 사건, 5.3 인천항쟁, 6.29 선언과 100만 인파가 몰렸던 이한열 학생 장례식 등 굵직굵직한 당시의 사건들이 저자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겪은 일화로 소개되어 있어 신문기사로 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2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경동산업 노동자 세 명이 끝내 분신사 하게 되는 과정은 저자가 당시에 그 공장에 있었기에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이른바 조직폭력배로 구성된 '구사대'에 몰려 옥상으로 쫓겨 올라 간 상태에서 노조 간부 세 사람이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일회용 라이터로 경찰들의 접근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불도 못 붙일 새끼들"이라며 조롱하는 경찰들의 대처가 그 대목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당시 치열했던 투쟁현장을 오늘의 감각과 오늘의 현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도 매우 소중해 보인다. 오늘의 정치사회 현실과 노동자 농민들의 삶이 자연스레 대비된다.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과 그 열매가 다 어디로 갔는지 떠 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거리를 메우고 있는 반 한·미 FTA 시위대. 여전히 분신자살을 하는 민중.
독자는 당시에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었느냐에 따라 감회가 조금씩 다를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역사의 생소한 부위를 간접 체험하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이 갖고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하나의 큰 역사적 흐름으로 재구성해 놓은 점이 이 책의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장과 학교, 교회, 감옥, 거리에서 젊음을 다 바쳐 군사독재와 맞서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연애 이야기와 재치와 하늘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일 등 환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화들도 끼어있다. 고통의 노동현장에 가기 위해서 유서와도 같은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가출을 감행하는 어린 여대생의 결단은 부모에 대한 죄스러움과 위로로 가득하다.
다니던 대학을 뛰쳐나와 공장으로 가버린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이영희 교수에게 자식하나 잘 키웠다고 돈이나 듬뿍 보내 주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고 박현채 선생. 박현채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는 저자의 결혼식장에 양쪽 집안사람들이 모였는데 공안검사들과 민주화 투사들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른바 노선차이로 결별을 작정하는 대목이라든가 공장에서 위장취업자임이 들통 난 다음에 벌어지는 웃지 못 할 일화들. 둘째형인 황지우 시인과 신림동 자취방에서 함께 살던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이 책은 저자가 함께 활동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있다.
아쉬운 것은 같이 웃고 같이 울며 동고동락했던 그 '젊음'들이 각기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며 각자의 길로 가고 있는지를 책의 끝부분에 곁들여 주었다면 20년 전의 역사를 단지 회상과 추억의 소재로만 바라보지 않고 보다 겸손하고 숙연하게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한 시기에 사회적으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는 이후 살아가는 되는 인생의 풍향계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한 인간에 대한 고정불편의 평가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와 덕목을 끊임없이 갈고 닦지 않으면 어느새 구세대, 기성세대가 되어 그토록 저항 해 마지않던 기득권자의 대열에 편입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저자가 이 책을 쓴 후 바로 뇌경색으로 쓰려져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집필하거나 번역한 십 수권의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책들과 함께 그의 쾌유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창비. 2007. 지은이 황광우. 값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