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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진작부터도 알았지만 지금 내 앞에 놓인 네모난 상자는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물건이다. 이놈 하나만 있으면 이 지구 소식을 한눈에 볼 수도 있고, 잃어버린 친구도 찾아주고, 스승도 찾아주고,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만나고 싶지 않던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듯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인공위성 사진을 검색해 보면 우리 마을, 우리 집도 내려다보이고, 어릴 적 뛰어놀던 들판과 피기를 뽑아먹던 저수지 둑도 보이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모르는 것이 있어도, 궁금한 것이 있어도 그 단어 하나만 툭 처넣으면 수많은 정보가 거물에 걸린 고기떼처럼 줄줄이 올라오고, 써 놓은 글을 검색기에 집어넣으면 띄어쓰기, 맞춤법, 틀린 낱말 등도 다 알아서 가르쳐주니 한글은 애써 왜 배웠나 싶기도 하다.

나는 지난 가을 11월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내 고향 감나무 이야기를 썼더니 청도가 고향이라는 사람은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가운 법이라며 쪽지도 보냈다.

2000년도에 컴퓨터를 배우게 되었는데 취미인 글쓰기를 하면서 내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기며 여러 문우도 만나고 신기한 일을 많이 겪기는 하지만, 며칠 전 나는 또 신기한 일을 경험하였다.

▲ 빨간 화살표가 가르치는 담 모퉁이가 기환이 오빠의 집이었다. 지금은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 서미애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으로 쪽지가 와 있었다. 클릭을 해 보았더니 같은 동네에 살던 2년 선배 오빠였다. 우연히 <오마이뉴스>에서 내 글을 보게 되었는데 가슴이 찡했고, 또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오빠와 나는 한마을에 살긴 했지만 대화를 나눠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오빠도 내 이름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고, 나도 오빠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오빠네가 우리 대문 앞에서 보이는 모퉁이 집이라 오빠 집 담 모퉁이를 돌아서면 뒷모습이 감춰지고, 또 오빠 집 담 모퉁이를 돌아오면 반가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해서 '기환이네 담 모퉁이를 돌아설 때'라는 문구를 가끔 내 글에 인용할 때도 있었다.

자기를 기억하면 메일을 달라는 말에 답장을 했고, 정말 반가워하는 오빠의 답장을 또 받으면서 전화 통화도 하게 되었다. 오빠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대구로 이사를 하였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오빠의 집이 고향에 있고 부모님도 그곳에 살고 계시는 줄 알았으니 고향소식에 얼마나 어두운지 모르겠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으니 내 글에서 고향의 향수를 더욱 짙게 느낀 것 같은 오빠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와 내가 친하진 않았지만 오빠는 우리 집에 대한 기억은 많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특히 오빠를 많이 예뻐해 주었다는 이야기와 언니 이름도 또렷이 기억하고, 또 남동생의 안부도 무척 궁금해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똑똑했던 남동생에게 걸었던 기대를 온 동네 사람이 다 알고 있었기에 누구라도 우리 집 안부를 물을 때면 남동생 안부부터 묻는 것이 통례였다. 오빠는 나에 대해서 "너는 참 말이 없었던 아이었어"라고 기억해냈다.

"오빠 그건 내가 다리 때문에 기가 죽어서 그랬다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목구멍에 걸려서 안 넘어오더라.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는 이야기지. 지금은 너무 많아서 탈이야"하며 깔깔 웃었더니, 오빠는 "아 그랬었구나. 여하튼 니가 말이 너무 없어서 대화를 많이 못 했던 것 같다 그쟈?"라고 답했다.

▲ 댕그렁 댕그렁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 지금은 차임벨로 대신하지만 추억의 교회 종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 서미애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활시위처럼 당겨진 시공 앞에서 예전의 말 못하던 우리는 없었다. 어릴 때 한 고향에서 자랐던 인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반갑고 할 말도 많았다.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또 연락하자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신기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엄마에게 얼른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 재밌는 이야기하나 해 주까?"
"오냐 무슨 재밌는 이야기고?"

"엄마 그 마을회관 있던 자리에 살던 기환이 오빠 알지?"
"그래 알지. 갸 동생이 영환이고 태환이 아니가. 근데 갸는 와?"

"엄마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 쓴다 캤잖아? 그런데 기환이 오빠가 내 글보고 서로 연락이 되어 방금 전화도 했다 아이가. 웃기제?"
"우야꼬 갸가 우째 니 글을 봤다카더노?"

"몰라. <오마이뉴스>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봤는갑제. 우리 아부지가 오빠를 특히 이뻐해 주셨다 카면서 언니이름도 기억하고 진우 소식도 궁금해 하더라."
"그래 맞다. 기환이 저거 아부지하고 너거 아부지하고 동창생이고 친한 친구였다 아이가. 기환이가 특히 공부도 잘하고 얌전해서 아부지가 마이 이뻐했었다. 갸가 아매 지금 경찰관이라 카재?"

"응 부산에서 경찰관이라 카더라."
"그나저나 야야 컴퓨터 그거 참말로 희한하다. 우예 그 안에서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옛날 사람들도 만나고 그라노? 나는 암만 생각해도 이해를 몬하겠다. 진짜 희안한 물건이네."


▲ 내 친구 인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추억의 이발소. 한쪽으로 기울어 가곤있지만 아직도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다.
ⓒ 서미애
엄마는 계속 컴퓨터 그거 참 희한하다. 희한하다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왜 안 그러실까? 젊은 나도 요술단지 같은 이 컴퓨터가 신기하기만 한데, 칠순이 넘은 엄마는 얼마나 더 신기하실까 싶어 빙긋 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금도 그 희한한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고향 오빠가 우연히 내 글을 보았듯이 편물공장에서 함께 일하며 막연한 문학의 꿈을 함께 꾸던 내 친구 경아도, 또 손목 한 번 잡혀 보지 못하고 2년 동안 편지만 했던 사이지만 내가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오빠도, 언젠가는 내 글을 읽고 연락해 오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하면서….

나는 앞으로도 이 희한한 컴퓨터 속에서 얼마나 더 신기한 일을 경험을 할지 모르겠다.

#오마이뉴스#오빠#글#쪽지#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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