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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하반기에 중국사회과학원 등이 펴낸 <천일각 소장 명초본 천성령 교증>. 1999년에 새롭게 발견된 당나라 때의 법령을 수록하고 있는 이 책에는 기사 본문에서 소개될 전령 및 부역령 조문들이 담겨 있다. 책 2권 가격이 한국화폐 10만원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진귀한 서적이다. 당나라 법령을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원리는 본문에서 소개되는 바와 같이 예법질서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하반기에 중국사회과학원 등이 펴낸 <천일각 소장 명초본 천성령 교증>. 1999년에 새롭게 발견된 당나라 때의 법령을 수록하고 있는 이 책에는 기사 본문에서 소개될 전령 및 부역령 조문들이 담겨 있다. 책 2권 가격이 한국화폐 10만원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진귀한 서적이다. 당나라 법령을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원리는 본문에서 소개되는 바와 같이 예법질서라고 할 수 있다. ⓒ 중화서국
한국을 포함해서 서양문화에 편입된 나라들의 법률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원리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이다. 이러한 최고원리는 이들 지역의 헌법뿐만 아니라 각종 법률의 저변에서 사회적 규범을 움직이고 있다.

그에 비해, 과거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는 이와는 달리 예법(禮法)이라는 원리가 사회를 지배했다. 예법질서는 사회구성원들을 차별화하고 또 인간 간의 의리를 강제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구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법률 곳곳에 깔려 있었다.

물론 중국이 곧 동아시아는 아니지만 전통시대의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중국사회의 최고원리 속에서 동아시아사회의 최고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사례를 당나라 때의 법률인 전령(田令)과 부역령(賦役令)에서 하나씩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토지 법령인 전령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예법이 중국사회의 최고원리였다는 점은, 당나라 때의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가 예법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균전제는 소수 특권층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기 위한 토지제도다. 북위 시대(386~534년)에 처음 시행된 이 균전제는 당나라 전기까지만 해도 국가의 토지정책을 지배한 최고의 정책이념이었다.

그리고 균전제를 시행한 정책목표 중의 하나는 농민생활의 안정이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여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원(稅源)으로서의 농민가계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농민생활의 안정이라는 균전제의 목표는 예법이라는 보다 상위의 법이념에 의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 점은 전령에서 예법질서의 유지를 위해 균전제가 부분적으로 파괴된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균전제 하면서도 예법 질서 지킨다며 토지매매 허용

농민생활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농민들이 토지를 팔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편이 바람직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법질서를 유지하다는 명목 하에 가난한 농민들이 토지를 팔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다음의 전령 규정은 균전제 하에서 토지매매를 허용한 4가지 경우 중의 하나다.

"서민 중에 사망한 사람이 있는데도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룰 수 없는 경우에는 영업전(永業田)을 팔 수 있도록 한다."

여기서 영업전이란 균전제 하에서 구분전(口分田)과 함께 지급된 토지를 가리킨다. 이 조문에 따르면,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식을 치룰 수 없는 경우에는 나라에서 지급받은 영업전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다고 하였다. 언뜻 보면, 가난한 농민을 배려한 조문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조문에서 무서운 '권력적 강제'를 읽을 수 있다.

집안이 가난하면 약식으로라도 죽은 사람을 묻을 수 있도록 허용하거나 혹은 향촌사회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서민을 위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 조문은 사회가 인정하는 최소한의 장례비용을 부담하도록 하기 위해 농민에게 자기 땅을 팔도록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 이 조문이 있기 때문에, 가난한 농민은 "돈이 없어서 장례를 제대로 치룰 수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장례비도 치를 수 없는 농민이 그나마 땅을 팔아 장례비에 충당해야 한다면, 아마 장례식 이후에 그 농민은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민이 되어 각지를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진정으로 서민을 위하는 권력이라면 약식 장례식을 허용하거나 혹은 향촌에서 장례식을 보조하도록 강제하는 편이 훨씬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중국사회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장례비 부담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토지를 팔아서라도 장례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위 조문의 입법취지는 토지를 팔게 해서라도 장례비를 부담시키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 간의 예법질서를 유지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 및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이미지는 왕조교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계승되는 예법질서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균전제는 그 이전 시기부터 중국사회를 지배해온 예법질서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부역령에 나타나는 예법의 우위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부역령에 다음 조문이 있다.

"효자, 순손(順孫), 의부(義夫), 절부(節婦)의 뜻과 행실이 향촌에 널리 알려진 경우에는, (담당 관리가) 문서로써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후에, 마을 입구에 표시하고 같은 호적에 있는 자에게는 각종 부역을 모두 면제해 준다."

여기서, 순손은 할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한 손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조문에 따르면, 가족들에게 예를 실천한 사람들과 그 친족에게 부역을 면제해 준다고 했다. 또 마을 입구에 효자비·열녀비 등도 세우도록 하고 있다. 나라에 대한 인민의 주요 의무 중 하나인 부역도 예법질서를 위해서는 면제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위 조문 역시 언뜻 보면 그저 '아름다운 법률'처럼 보일 수 있다. 가족 간의 의리를 지킨 사람에게 국가가 부역을 면제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사회 실질적 지배자는 '왕조' 아닌 '예(禮)'

하지만, 이 조문에서 우리는 사회의 예법질서를 구현하려는 국가적 강제의 또 한 가지 측면을 엿볼 수 있다. 효자·순손·의부의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과부의 경우에는 이 조문이 그 '앞길'에 상당한 제약이 될 수 있다.

만약 부역이라는 무거운 부담을 면제받기 위해 이 조문을 악용하고자 하면, 친족들이 나서서 과부의 재가를 방해하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자기 집안에 절부 한 사람만 나오면 동네 입구에 비가 세워짐은 물론이요 일정 범위 내의 친족이 부역을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부에게는 그저 절부라는 타이틀만 얹어주고 희생을 강요하면서, 그 덕분에 친족들은 부역면제라는 실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조문은 부역 면제를 희망하는 친족들의 압력으로 예법이라는 미명 하에 과부의 재가를 막기 위한 규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산 사람(과부)과 죽은 사람(남편)의 의리 즉 예를 토대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권력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권력이 부역면제라는 당근을 보여주며 과부 등의 재가를 금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회의 예법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당나라 때의 부역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예'라는 최고원리가 사회를 지배하였으며, 그것은 왕조교체에 관계없이 특히 법률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중국사회에 계승되었다.

동아시아의 예는 인간 간의 차별을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구현하는 데에는 더 효율적이었던 데 비해, 예법 유지를 위해 사회적 약자(중소 농민이나 과부 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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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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