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 연주로 유명한 '거리의 악사' 백연화(84) 할아버지가 오는 12일부터 열리는 2007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PiFan) 트레일러(Trailer) 주인공으로 출연해 화제가 되고 있다. 트레일러란 영화제 시작 전에 상영되는 상징적인 영상물이다.
2007 PiFan 트레일러는 인간 내면에 간직한 '파랑새의 꿈'을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는데 백연화 할아버지가 '사랑과 환상 그리고 모험'속에서 파랑새을 좇는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것.
장맛비가 쏟아지는 지난 2일 밤 9시, 동대문 광장시장 먹자골목에서 백연화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와 할아버지의 만남은 1990년 지방에서 열린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바자음악회 이후 17년 만이다.
당시 길게 길렀던 하얀 수염을 말끔히 잘라 내 하나도 늙지 않은 듯,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멋쟁이 여자친구(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그 할멈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날 자주 만나주지 않아"라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에게 언제 PiFan 트레일러를 찍었냐고 물었더니 "응, 지난 6월초 제부도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찍느라고 힘들었지"라며 "내가 나온 영화 어디서 볼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7월12일 세계 32개국 유명 영화인들과 문화예술인이 참석하는 PiFan 개막식에서 상영되며 현재는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하자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못하며 기뻐했다.
트레일러 제작진은 영화를 찍기 위해 별다른 의상과 소품을 따로 장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평상시 착용하는 모자와 의상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보석 브로치, 가방, 꽃 등도 모두 할아버지 것을 이용했다.
1923년생인 백 할아버지는 15살 때부터 유랑극단과 5일장을 따라다니며 잡일을 거들었다. 이 때부터 줄타기를 비롯해 피리와 퉁소를 불었지만 값비싼 색소폰을 구입한다는 것은 가난한 악사에게 환상이며 꿈에 불과했다.
백 할아버지는 50살이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프랑스제 색소폰을 구입했고 대한민국 악사들의 본거지인 종로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무대(?)에 데뷔했다. 화려한 밤무대에 서기엔 50세란 나이와 어설픈 연주 실력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색소폰을 품에 안은 그의 '꿈'은 이루어진 것.
그때부터 초대받지 않은 손님 거리의 악사, 백연화 할아버지는 '구라도사'라는 애칭을 가지고 종로1가 빈대떡 골목에서 낙원상가, 탑골공원 그리고 동대문 광장시장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갈대의 순정', '울어라 열풍아', '용두산 엘리지',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을 연주하며 무료한 노인들과 시장 상인들의 친근한 벗으로 함께해 왔다.
PiFan 트레일러를 연출한 용이 감독은 "행복을 찾아 나선 찌르찌르와 미찌르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파랑새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꿈을 좇는 사람의 모습을 이미지화하려고 했다"며 "각박하고 힘든 세상이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84세 백 할아버지가 이 시대의 파랑새이었기에 트레일러 주인공으로 캐스팅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백 할아버지는 집이 없다. 종로 뒷골목 허름한 무허가 하숙집에서 수십 년을 살고 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욕심도 없다. 종로, 동대문 뒷골목을 배회하는 배고픈 노숙자나 가출 청소년들을 만나면 주저 없이 호주머니 돈을 털어 내놓는다. 색소폰을 불기에는 약한 60kg의 몸무게지만 육식 보다는 채식을 주로 한다. 백 할아버지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보내는 따스한 격려와 박수소리다.
오는 12일 오후 6시 피판 개막행사가 열리는 부천시민회관 앞 광장에서 '거리의 악사' 피판의 파랑새 백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타임즈(www.bucheontime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