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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아침에 책가방을 가지러 간다거나 저녁에 축구공을 가지러 방으로 가는 일상적인 일이 대단히 힘든 고역이 되고 말았다. 2층 복도, 누군지 모를 그 여인이 서있던 방문 앞을 지날 때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늘한 한기가 머리털을 쭈뼛 세운다.
이상한 노릇이다. 복도에는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는데 어디서 그렇게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왼편으로 난 창이라 해봐야 통유리로 되어있어 새어 들어올 구석이 없는데도 복도에는 늘 그렇게 알 수 없는 바람이 맴돈다.
몇 년 후, 1층 안방 바닥을 뜯고 그 자리에 온돌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는 동안, 2층 그 방, 문지방에 여인이 서있던 바로 그 방을 안방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나는 어머니와 같이, 그 방에 앉아 있다. 침대 정면에 놓인 TV에서는 주말의 명화가 나오고 있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1층 부엌에 야식을 만들러 내려갔다. 올라오려면 부엌으로부터 계단이 있는 로비로 나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문이 있고, 이 문은 무거울 뿐더러 그 위에 작은 종이 달려있어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고 애국가가 흐르더니 화면이 하얗게 탈색된다. 어머니는 곁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TV를 끄고, 왼편의 테이블에 놓여있던 만화책을 집어든다. <아이큐**>라는 만화잡지로,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몇 장 넘기다 옆에 내려놓고, 가족들이 야식을 갖고 올라오기 까지 눈을 붙이려 누웠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생각했다. 보일러 소리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저 소리는 흉내를 내자면 저벅-저벅-, 이런 소리다. 탁-탁- 하는, 파이프 속에서 울리는 보일러음과는 다르다. 창밖으로 부는 바람 소리도 아니고,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소리는 바닥에서 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맨발로 걸을 때, 발이 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의 평온한 주말 저녁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발자국 소리가 저편으로부터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
작심하고 눈을 떠 본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방 안에도, 문지방 너머로 깜깜한 복도에도 아무도 없다. 그대로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뭔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불안함에 도로 눈을 감는다. 그와 동시에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다시 다가온다. 꼼짝도 할 수 없고, 소리가 들리는데도 눈을 뜰 수 없다. 바로 옆까지 오더니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찢기 시작했다. 벽에 달린 달력을 찢는 것일까. 뭔가 한참을 찢더니, 쿵하고 떨어트리는 소리가 나고, 이내 잠잠해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제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1층 로비로 나오는 무거운 여닫는 소리와 함께 작은 종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물에 데친 소시지와 과일, 음료, 캔맥주 등을 들고 방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나는 눈을 떴다. 땀이 온몸을 적신 채였다.
옆에 두었던 만화책의 모퉁이가 찢긴 채 바닥에 떨어져 있고, 찢겨진 부분은 침대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책은 왜 찢었느냐는 가족들의 물음. 그건 내가 그 여자한테 물을 소린데 말이지. 방금 겪은 일을 가족들에게 말해보지만, 어린아이의 장난쯤으로 여기며 웃는다. 소시지나 먹으라며 입에 억지로 쳐 넣는다. 소시지 이름도 기억난다. 에센뽀득. 이름이 좀 괴상해야 말이지.
아무튼 내가 대단한 장난꾸러기에 악동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데도 이러는 것은 대단히 억울한 노릇이다. 억울하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믿겠는가.
당시 지하층은 세를 주고 있는데, 그곳에 나보다 한살 어린 남자애가 있다. 녀석에게 과자와 그리고 더하여 조잡한 그림으로 매독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소개하고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긴, 언젠가 땅에서 주운 성병예방목적의 소책자 - 초등학생에게 이건 플레이보이지 정도의 무게를 갖는다 - 를 주겠다며 꼬셔, 녀석을 데리고 혼자서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2층의 그 문제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 방 바로 옆 화장실에서 분무기에 담아온 수돗물을 성수라고 뻥치며 여기저기 뿌려댔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도 외면서 말이지. 하지만 수돗물을 이용한 이 엉터리 엑소시즘이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유령 입장에서는 터무니없게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어디선가 본 괴담을 떠올리며, 박수를 친다. 그러면서 유령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당신이 유령이라면 따라서 소리를 내봐요!" 그러자 우적우적! 찹찹!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럴수가. 드디어 유령과 대화를 하는 것인가? 그건 유령이 내는 소리답게 분명 불쾌하면서도 괴이쩍은 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싶더니만. 알고 보니 아랫집 녀석이 옆에서 게걸스럽게 과자를 먹으며 내는 소리였다. 이런! 아무튼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했다.
정체불명의 여인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 가던 어느 날. 어머니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도, 여자 울음소리 같은 괴이한 소리를 듣고 소름끼쳐했다고. 그리고 이사를 나오고 나서 동네 전파사의 기사 아저씨에게 들은 얘기인데, 그 집에 이전에 살던 여자 - 그 여인은 불임이었다던가 - 가 남편의 외도에 낙심하여 약을 먹고 쓰러졌는데, 빨리 손을 쓰지 못해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본 여인이 바로 그 여인이었던가.
그러나 실은, 정말 정확히는 그가 누구인지, 문지방에 서있던 그 여인이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있은 뒤 나는 내가 본 것이 유령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유령인지 뭔지 모를 일이다. 엉뚱한, 웃기는 상상을 하자면, 그가 유령이 아니라 천사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와 대화를 나눠보거나 그의 신분증을 보고 확인한 것도 아니니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거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실존하는, 실재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이 정교하고 너무도 훌륭한, 거의 완벽할 지경인 이 눈, 최고급 디지털카메라 뺨따귀 오백만대를 후려갈기고도 남을 이 눈이 감지하지 못하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나는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왜 그리 불안해했을까. 인적 드문 밤길에 저 앞에서 낯선 남자가 걸어올 때 경계심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알지 못하는 상대, 미지의 대상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렇듯이 보이지 않고,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의 그 낯설음에 숨이 막혔던 것이다.
내게 뭔가 해를 끼치지 않아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근처에 있다는 자체가 숨이 막히고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나의 그 공포, 두려움은 어쩌면 증오나 미움, 혐오의 다른 이름,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3*번지, 2층 복도에 감돌던 그 스산한 바람은 괴기스러운 배회가 아니라 어쩌면 쓸쓸하고 구슬픈 자락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나는 이제껏, 지금껏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