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이 '어느새'에서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잊어버리고,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는 그런 날, <꿈꾸는 사람들의 도시, 뉴욕-네멋대로 행복하라>(글 사진 박준, 삼성출판사,15,000원)가 집에 도착했다.
한국사회에서 '네멋대로 해봐'만큼 위험한 말은 없다. 네멋대로 해보았자, 되는 건 없고 남는 건 후회뿐이니, 불확실한 모험에 오늘을 걸지 말라는 날 세운 경고가 숨어있기 십상이다.
책의 맨 뒷장을 덮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묻어둔 꿈이 다시 살아났고, 되살아난 꿈은 일상을 위협했다. 흔들리는 일상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되살아난 꿈은 잊고, 지우고, 접어둔 행복찾기를 재촉했다. 요즘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
<네멋대로 행복하라> 표지에 멋대로 둘러진 띠를 풀어보니 뉴욕 지하철이 그려진 지도다. 띠를 벗겨내면 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나온다. 스케이트보드를 깔개삼아 앉은 이효리 닮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다. 웃는 여자의 등 뒤로 공연 게시판이 서있다. 게시판엔 공연포스터가 덕지덕지 제멋대로 붙어있다. 게시판 기둥의 노란빛깔이 눈에 부시다.
폐교였던 미술관의 낡은 복도바닥에 엄지손톱만한 구멍이 뚫려있다. 납작 엎드려 들여다보니 한 여자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팔을 내민다. 흔해빠진 도자기를 아크릴로 바꾼 화장실 좌변기 물탱크엔 금붕어가 한가롭게 노닌다. 전깃불엔 신발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쓰레기가 널려있는 길바닥은 'Are you for REAL?(너 진심이야?)하고 묻는다.
창문 너머 맞은편 건물에서 젊은 남녀가 한창 사랑에 빠져 있다. 웬 횡재하겠지만 뉴요커들에겐 한낱 일상이란다. 사랑에 애쓰는 남녀는 사랑 잘하기에 바빠 창문 닫을 짬도 없다.
창문가에 기댄 사람은 걸작을 꿈꾸는 작품의 마지막 한획을 어디에 그을지 고민하느라 바빠 남의 사랑을 훔쳐볼 짬이 없다.
뉴요커에게 삶의 주인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다. 인생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기회를 잡는 건 바로 자신이다. 혼자 가기에 독립적이고, 독립적이라 치열하고, 치열해서 자유롭다.
사람이 쥐 눈치를 봐야하는 지하철은 멀쩡히 달리다 그냥 멈춘다. 멈춘 지 1시간이 넘었지만 왜 섰는지 언제 출발할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지하터널에 갇힌 핸드폰은 묵묵부답이다. 치솟는 방세를 내기위해 투잡 쓰리잡을 해야 한다. 시간제 식당보조 자리 하나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래도 행복을 꿈꾸는 모험가들이 꾸역꾸역 뉴욕으로 몰려온다. 굴레에서 자유롭고 매순간 살아있음을 절감하게 하는 열정이 그리운 사람들이 뉴욕을 채운다.
작가 박준이 만난 뉴요커들은 말한다.
"사는 게 힘들어 죽을지경이에요. 근데 잠깐이라도 뉴욕을 떠날 수 없네요. 뉴욕을 떠나면 내가 감쪽같이 사라질 것 같거든요."
누구의 고향도 아니지만 누구의 고향이라도 될 수 있는 뉴욕.
같음보다 다름이 더 익숙한 곳.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
같이 살기위해 서로를 이해해줄 수밖에 없는 곳.
존중받기위해 먼저 존중해 주어야 하는 곳.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죽을 만큼 고생하다 서른을 훌쩍 넘겨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뉴욕에 와서 죽도록 일만하다 죽을 때까지 하고 싶었던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국인 뉴요커는 말한다.
"뉴욕에 안 왔으면 정말 죽었을 거예요."
"한 가지 문화,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유행이 뿜어내는 뻔한 반복에 지쳤다면 뉴욕으로 와. 뉴욕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온갖 인종이 품어내는 리얼 라이프, 진짜 삶이 있거든. 뉴요커들은 남에게 친절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친절한 척하지 않는 진짜 친절한 사람이지. 모두가 모두에게 이방인이기에 거칠지만, 덜익은 만큼 뭐든지 이룰 수 있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면,
내 모습이 다른 사람과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에 지쳤다면,
지금 삶이 뻔해서 남은 생이라도 대충 살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하는 일로 인해 내가 변하고 싶다면,
"내가 이것을 만들었어!"하고 뽐내고 싶다면,
당신은 이제 뉴욕으로 가야 한다.
행복을 찾으러 떠나야 한다.
떠날 수 없다면 뉴욕의 꿈이라도 품어야 한다.
물론 맘대로 안 되지만…….
덧붙이는 글 | 글과 사진을 함께 만든 박준의 여권엔 200개가 넘는 스탬프가 찍혀있다고 한다. 스스로 밝힌 직업은 에세이스트와 다큐멘터리 감독. 2006년 'On the Road-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 뜨면서 여행경비를 선불로 받고 뉴욕을 제멋대로 헤집은 복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