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쳤다. 마음속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무작정 저지르고 봤다.
2주 전의 어느 밤, 퇴근한 남편이 샤워하면서 말했다.
"배지영, 작은누나(아이의 작은 고모)가 현기(작은누나 아들, 고등학생) 보러 뉴질랜드 간대. 그래서 배지영하고 제규도 함께 가면 좋겠다고 했어. 잘했지?"
"우와! 끝내준다. 다음 달쯤에 가신대?"
"그건 모르겠어. 가긴 갈 거래."
다음날 낮에 작은 누나 전화를 받았다. 내일 날짜로 비행기 좌석이 딱 3개 남아서 당장 예약했다고 했다. 아이는 학교 기말 시험을 봐야 하고, 나는 일터에 휴가도 안 냈는데 일단 여권 사본을 보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서 인천 국제공항으로 갔다.
공항에는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 예약한 좌석은 세 자리, 그러나 우리 아이 좌석은 안 떴다. 항공사 직원은 아무리 해도 좌석이 없다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간 다음에 오클랜드 대사관으로 찾아가라고 했다. 아이가 지금 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둘이서 여행을 다녔지만 무릎에 앉힌 적은 없었다. 독립한 채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간은 고르게 흘렀지만 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아이는 자리에 앉히고, 나는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서라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뉴질랜드에서는 승인을 하지 않았다. 1시간 가까이 컴퓨터를 잡고 뭔가를 시도하는 항공사 직원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심란했다. 전 날, 갑작스런 휴가에 대한 양해 전화 50여 통을 할 때보다 진땀이 났다.
마침내 사라진 좌석에 대한 미스터리는 착오였다고 밝혀져서 탑승권을 받았다. 비행기 출발 시각 10분 전이었다. 화물로 보낼 짐은 특별대접을 받아서 따로 커트에 실렸다. 우리는 탑승구까지 전력질주 해야 했다. 아이의 탑승권을 찾지 못해 애를 먹던 항공사 직원은 '훈남'이어서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탑승구까지 함께 달려와 줬다.
우리가 자리에 앉고 3분 뒤에 비행기는 뉴질랜드로 가기 위해 이륙했다. 내가 뉴질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두 가지, 조카 전현기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곳, 작은 누나네 회사에서 쓰는 나무는 뉴질랜드에서 실어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여행 계획은 딱하게도 달랑 한 가지, 공항에 있는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릴 예정이라는 것뿐이었다.
기내에서는 책을 빌려주는데 <뉴질랜드 100배 즐기기>가 있었다. 11시간의 비행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뉴질랜드에 대해서는 비행기를 탈 때보다 많이 알게 됐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실사로 찍었다는 것, 뉴질랜드 수도는 오클랜드가 아니라 웰링턴이라는 것도 알았다.
무언가 안다는 행위는 새로운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짠 '급여행계획'으로는 오클랜드 공항에서부터 렌터카로 해밀턴, 로토루아, 타우포를 거쳐 조카가 있는 파머스톤 노스까지 가는 거였다. 돌아올 때는 파머스톤 노스에서 렌터카를 돌려주고, 비행기로 오클랜드까지 오는 거였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차 핸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3년 전 영국 런던, 모든 차들의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었다. 차 핸들이 왼쪽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길을 건널 때 왼쪽을 살피게 된다. 그래서 런던의 도로에는 'LOOK RIGHT'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와 내가 탄 버스는 차 핸들이 왼쪽에 있는, 프랑스에서 온 남자를 치었다. 오른쪽에서 신호에 맞게 오는 차를 못 보고 차에 받힌 남자의 피는 옷을 적시고 도로로 흘렀다.
운전 걱정을 한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대책 없이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누나는 뉴질랜드에서 3년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전현기를 위해서 과일 상자 가득 김치를 싸왔다. 그래서 나는 입국 신고서를 쓸 때에 음식을 가져왔다고 따로 표시했다.
섬나라인 뉴질랜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엄격하게 규제한다. 그래야 이미지에 걸맞게 청정 뉴질랜드를 유지할 수 있다. 김치를 상자 가득 가져온 우리는 따로 한 켠에 있는 입국 심사대로 가야 했다. 김치 상자는 뜯겼다. 혹시 김칫국물이 넘쳐나서 샐까 봐 꼼꼼하게 동여 매 놓은, 웅장한 규모의 김치가 나왔다. 그네들은 저절로 인상을 쓰며 물었다.
"김치 말고 다른 것도 있습니까?"
"단지 김치뿐입니다."
어떤 사람의 김치 상자는 암담할 정도로 파헤치기도 했다는데 우리가 가져온 김치는 속속들이 헤집지 않아서 상자를 테이프로 붙이기만 하면 됐다. 예감이 좋았다. 이 여행은 순조로울 모양이었다. 작은 누나 발걸음은 빨라졌다. 곧 아들을 만날 거라는 설렘은 뒷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카 전현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새 많이 자라고 변했겠지만 못 알아볼 리 없다. 찬찬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엄마! 숙모! 제규야!" 하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한국인 청소년은 없었다. 뉴질랜드 국내용 공중전화카드를 사서 전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폴 전(조카 전현기의 뉴질랜드 이름)이야?"
"나는 폴 전이 아니야."
"혹시, 거기 파머스톤 노스야?"
"아니야. 너는 잘못된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의 말은 같았다.
"나는 네가 찾는 폴 전이 아니야."
블랙홀에 빠지면 이럴까. 우리는 뉴질랜드에 온 게 아니라 지구 밖의 어느 별에 온 기분을 느꼈다. 작은누나는 기다리던 아들이 안 나와서 걱정과 짜증이 일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현기의 전화번호를 다시 살펴보았다. 오, 맙소사! 한국에서 국제전화 걸 때처럼 국가 번호까지 모두 누르며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러나 전화 통화를 했다고 현기를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그 애가 있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오클랜드까지는 자동차로 7시 반 거리,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만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는 택시처럼 잡아타거나 불러서 탈 수는 없다. 전현기군은 늦잠에서 막 일어난 참이어서 우리는 적어도 3시간 이상은 오클랜드 공항에서 기다려야 했다.
덧붙이는 글 |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의 해밀턴, 로투루아, 타우포, 파머스턴 노스를 자동차로 다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