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거리는 밤이 깊을수록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젊은 커플들이 물결을 이루며 거리를 오가고, 카페의 은은한 조명 아래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가 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듯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 10시였다.
그런데, 그 시각 한 극장(창조콘서트홀) 앞에서 발길을 멈추는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극장 입구에는 '심야공포연극' <죽이는 이야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토막 난 마네킹 다리 위에 피가 뿌려진 그림이 배경이었다. 섬뜩했다.
지하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 연극 무대의 조명이 꺼질 시각 무대 설치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연출이 바쁘게 이리저리 지시하고, 일손이 부족한 까닭인지 스태프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거들었다. 조금 전까지 같은 무대에서 다른 연극이 공연됐기 때문이다. 무대 설치 작업은 10시 25분, 관객 입장 직전까지 계속됐다.
'대체 이 늦은 시각 누가 연극을 보러올까'하는 생각에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다. 지하에서 1층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그새 꽉 차 있었다. 눈짐작으로 볼 때 대부분 20대, 그리고 연인들이었다. 여성끼리 온 관객도 적지 않게 보였다. 굳이 이곳을 찾은 까닭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연극이 시작하자 그 까닭은 바로 드러났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자극하는 '공포'
연극 <죽이는 이야기>(진영섭 작·김재환 연출)는 프로젝트그룹 '여름사냥'의 세 번째 작품. '위험한 아르바이트' '신 살인의 추억' '죄와 벌' '오늘의 요리' 등 네 편의 '공포'를 옴니버스로 묶었다. 유괴, 치정살인, 식인 등 뉴스에서 만날 수 있는 엽기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10시 35분, 객석에 불이 꺼지고 <죽이는 이야기>가 시작했다. 막이 오르고 첫 비명이 터지는 데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객석 뒤편 피투성이 원피스 차림의 산발 여인에게 조명이 비치자 "꺅!" 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첫 편은 '위험한 아르바이트'. 어느 병원의 시체실, 무서움에 떨며 젊은 남녀가 해부용 시체를 닦기 시작한다. 긴박한 음향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푸른 조명이 음산한 느낌을 더한다. 또 병원 특유의 포르말린 냄새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운다. 시각, 청각, 후각이 바짝 긴장한다. 때때로 객석에 물이 뿌려져 촉각까지 자극한다.
시체를 닦는 사이사이 산발 여인이 나타날 때마다 객석에선 비명이 울렸다. 숨 죽여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객석 머리 위로 흰 물체가 휙 지나가기도 한다. 다시 꺅! 연극이 시작하기 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연인들의 그림자가 거의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에의 집착이 광기로 변해 사랑하는 여인을 납치하는 '신 살인의 추억',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의 독백을 들려주는 '죄와 벌'로 장면이 바뀌고, 인육을 즐겨 먹는 한 가족의 만찬 풍경을 다룬 '오늘의 요리'로 막이 내릴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연극이 끝났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연극 <죽이는 이야기>는 제목과 달리 무언가를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생각보다 엽기적이지도 잔혹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대체로 무섭고, 때때로 우습기조차 하다. 좀 더 강한 자극을 기대했던 관객들로선 아쉬울 법도 하다. 기획을 맡은 하정아씨는 "공포라고 단지 무섭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무섭지만 시원하게 공포를 느끼고 끝날 때는 즐겁게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공포물이 연인을 가깝게 만드는 까닭
공포연극이나 공포영화 등은 혈관을 수축시켜 체온을 내려가게 한다. 냉방이 쌩쌩 돌아가는 극장 안에서 연인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포물을 볼 경우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진되는데, 이 같은 신체 변화가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좀더 색다른 데이트 코스를 찾는다면 한여름 밤 대학로로 발길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죽이는 이야기>는 오는 8월 31일(월요일 제외)까지 대학로 창조콘서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밖에 또 다른 심야공포연극 <오래된 아이>(오승수 작·연출)는 11일 대학로 아트홀 스타시티에서 막을 올린다.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공연 중인 유괴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2인 뮤지컬 <쓰릴 미>도 여름 사냥에 알맞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