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을 찾아서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1909년 8월 12일~1935년 1월 23일) 선생의 사후 1년 후인 1935년 동지에 <동아일보> 연재소설로 발표되었고, 최용신 선생은 소설 속에서 연애하는 주인공으로 인기를 누린 후 세간에서 잊히고 말았다.
동백장을 추서 받은 최용신 선생의 업적은 그 이상의 서훈으로도 모자람이 없음을 많은 국민이 이제는 알 것이다.
최용신 선생에게 동백장을 추서한 주체는 어디였을까?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훈처 또는 농림부가, 또는 그를 안산샘골로 파견한 YWCA가, 또는 루시동창회가, 또는 당시 샘골교회가, 또는 안산시가, 또는 경기도가 이 작업을 하였을까?
아니다! 놀랍게도 그 주체는 국가도, 그 어느 단체도, 기관도 아니었다. 안산에서 태어나 안산과 역동기의 역사를 함께하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김우경(74) 선생 개인의 열정으로 일구어낸 결과였다.
김우경 선생은 1933년 안산 둔대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안산에서 지냈다. 조실부모하여 큰 공부는 하지 못하였으나, 6.25전쟁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안산 근교 수리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직장을 다니며 어렵게 공부하던 중,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무렵 당시 20세의 김우경 선생은 소설 <상록수>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우경 선생님이 돌이 될 때 안산에서는 최용신 선생이 세상을 떠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고 최용신 선생의 직전 제자이신 자형(홍석필 장로)의 영향도 있었다. 최용신 선생을 자신에게 숙명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인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무엇이건 하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선 신학교에 들어가 신앙인의 자세를 배웠고 안산으로 내려와 최용신 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유품을 모으는 일을 시작하였다. 1934년 최용신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유품을 제자들이 하나씩 나누어서 간직하였으나 김우경 선생의 뜻에 호응하는 제자들이 유품을 모을 수 있도록 협력하였다.
이에 힘입은 김우경 선생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그 숭고한 얼을 이어받을 방법을 강구하였다. 1.4후퇴 때 폭격으로 소실한 강습소를 1960년 다시 지었고,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이 하시던 대로 야학을 열었다. 2개 반을 10년 동안 운영, 1970년까지 계속하였고 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야학을 시작한 1960년부터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고 30년 이상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1994년 11월 28일 국가보훈처에 최용신 선생을 위한 품의를 올렸다. 그 결과 1995년 9월, 30여 년의 염원이 이뤄져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김우경 선생이 인생의 황혼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였다.
염석주를 찾아서
최용신 선생에게 애국장을 바쳐 평생의 소원을 푼 김우경 선생은 30년의 자료수집을 통해, 최용신 선생의 농촌계몽사업을 가능하도록 뒤를 돌보아 주었던 당시 밤밭(현재 수원 율전리) 만석꾼 염석주(1895~1944) 선생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연구와 자료수집에 돌입하였다.
염석주는 신간회 소구역(수원) 조직운영의 책임자이자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을 지원하여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북만주(현재 길림성)에 60만평의 농장을 개척하고 독립군제2지대(김창환 장군)에 군량미를 조달하고 나머지는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을 위한 해외사업을 운영하였다.
국외사업의 윤곽이 일본경찰에 의해 탐지되고 배신자가 밀고해 염석주 선생은 동대문 경찰서에 체포되어 18일간의 모진 고문 끝에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두고 운명을 달리하였다.
여운형 선생과 신간회를 하였다는 이유로 좌경인으로 몰려, 자손들도 염석주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는커녕 민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음지에서 숨어살아야 하는 비운을 겪어야 하였다.
김우경 선생은 1차로 목표한 최용신 선생을 애족장이나마 1995년에 추서되게 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짓고, 그해부터 바로 염석주 선생의 복권 및 독립운동가 반열에 올리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보훈처를 상대로 6회 추서 품의를 올렸으나 번번이 자료부족으로 거부당하고 7회 품신을 준비 중이다.
김우경 선생은 독립유공자를 찾아나서 증거를 찾아 밝히고 추서를 하여야 마땅한 국가가, 개인이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행적을 밝히며 증거자료를 첨부하여 품신했는데도 자료부족이라는 이유를 붙여서 거부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우경 선생은 여러 가지 지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건강 문제로 자신의 마지막 사업을 만족스럽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최용신이나 염석주와 일가친척도 아니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바친 이 어른들의 큰 뜻이 있어 오늘날 우리는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염석주 선생님을 반드시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올리고 말겠다.” 김우경 선생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임에도 비장한 결의를 나타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늦어도 내년 3월까지는 일곱 번째 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이번 서류가 마지막 서류가 될 것을 기원하며 이 노구로나마 최선을 다하겠다”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마무리 말을 들은 필자는 자료로 받은 염석주 선생의 바랜 사진을 바로 볼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