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의 그림을 보면 속으로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하는 마음을 먹게 한다. 한마디로 첫 인상은 대단히 만만해 보인다. 100호, 200호의 캔버스도 어쩐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유치원 아이들이 맘먹은 데로 그리지 못해 포기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도 역시 원근, 구도 모두 무시된다. 그런 그의 개인전에는 오래도록 '놀이전'이라는 제목이 따라다녔다. 이런저런 대목에서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나, 흔히 예술에의 갈망으로 인해 미칠 듯한 방황과 고뇌는 어쩐지 머쓱해질 것만 같다.
미인과 미인도 사이에는 오랫동안 미묘한 모순과 상호보완이 작용하고 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인이라거나 진짜 사람같은 그림이라는 표현은 대단히 관용적이다. 그러나 전혀 미인처럼 그리지 않고, 그림같이 그리지 않는 그의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때론 무섭거나 혹은 대단히 서러운 감정이 복받치게 한다. 그림이라면서 큰 화폭 위에는 어눌한 필체로 '지껄이다' '다리 정강이' '치고 달리기' 등 소위 현대미술이 위압적으로 강요하는 어쩐지 무거운 주제라고는 없는데 말이다.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던 이명미 화가를 찾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처음 동기는 그림 때문이 아니었는데, 막상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고는 그림에 한없이 빠져든다. 미술 전문가도, 대단한 애호가도 아니지만 그림을 선택해서 즐기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아니 그의 그림은 전문가나 애호가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는 아주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술지상주의를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에게는 낯선 면도 없지 않지만 '쓰는 그림'이라는 애칭을 얻고 있는 이 화백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해체에 해학과 풍자가 강하게 개입하고 있다. 이화백은 그림이 잘 안될 때에 국어사전을 읽는다고 한다. 쓰는 그림의 기초는 역시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튼튼한 공부에 있었다.
언뜻 유치원 아이들의 그림처럼 만만히 보고 몇 걸음 걷다보면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충격을 받게 된다. 마치 조조의 아우 조식이 일곱 걸음 만에 지은 시에 조조의 살의가 사라진 것처럼 관람객은 이 화백의 진탕한 그림 유희 속에 담긴 강한 은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은유와 상징이 마침내 무거운 겨울옷을 벗고 여린 봄바람에도 풍부하게 펄럭거리는 치마로 바꿔 입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작가들은 그들 은유에 너무 오랫동안 중한 노역을 시켰다.
대구 수성구 허름한 상가 2층의 작업실에 커피 한 잔을 놓고 마주 않아 주고받은 대개의 언어들은 국내 최고의 현대미술가라는 무게에 걸맞지 않게 참으로 소박하였다. 하기야 작품에조차 일상언어로 휘갈겨 놓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그 반대라면 그도 참 어색한 일이다. 과거 한 희극배우가 한시간 반 동안 배꼽이 빠지게 웃기고는 막상 커튼콜에서는 멕베드의 표정으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것과 같은 웃지 못할 이율배반은 그에게 없었다. 딱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만나자마자 긴장의 무장을 풀어놓고 들은 그의 삶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에게 등교시간은 학교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당일 기분에 의해 들쭉날쭉했다. 생각해보면 요즘도 쉽지 않은 파격이 1960대 중반의 대구에서 벌어진 것은 정말 대단히 자유분방한 기질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 자유에 대한 실천적 지향이 결국 평생의 작업 속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견지되는 것이기에 그의 유희는 오히려 더욱 진솔하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전임교수 자리가 싫다는 이유로 이명미 화백은 서른다섯의 느즈막한 때에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과 함께 활동거점을 서울서 대구로 옮겼다. 사실 서울이 모든 문화예술의 권력적 중심역할이 지금보다 더 강했을 당시에 주활동지를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신에 자신의 작업 외에 대구의 문화계를 바라보는 여지가 생겼고, 결혼 이후 대구에서 화가로서의 개인 작업과 병행해서 대구 문화계의 구심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것 또한 이화백의 주된 화두인 유희와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냉소적 시대가 시체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는 했으나 놀이는 기본적으로 다중이 주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놀이는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다.
이화백은 소위 진보계열의 작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조직에 대한 개념도 분명하지 않다. 스스로 말하기도 "의도적이거나 조직적이진 않지만 대구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서 문화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비단 학자, 예술가에 머물지 않는다. 우체국장, 교회전도사, 수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와 교류한다.
"지금 시대의 문화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서로에게 새로운 기류를 자극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화백은 "그렇기 때문에 예술하는 사람의 문화적 보시는 해봄직한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못박는다. 세상은 예술가들에게도 계파를 강요하는데 그가 보이는 운동적 성향에 대해서는 부인한다. "애국가부터 부르는 자리에는 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아방가르드의 정신이라고 믿었다"라고 한다. 즉 자기 예술에의 충실이 결국 자아의 깊숙한 곳에 집단이 존재함을 저절로 알게 됐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래서 마침 동행한 윤정모 작가가 작금 시사저널의 문제들을 몇 마디 꺼내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작품을 선뜻 내주었다. 참으로 거침없는 것이 그의 작품들과 한 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2000년대는 그에게 치명적인 절망과 피할 수 없는 좌절을 조제해서 그의 잔에 집어넣었다. 그 스스로는 암에 걸려 위장을 모두 잘라내게 했고, 스스로 병마와의 싸움도 버거운 때에 애지중지 키운 어린 딸마저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 때문에 몇 년 그의 작업은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인지상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도 그가 그 충격에서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남의 일이라 해도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다는 이명미 화백은 다시금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제 수금의 시절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우스개도 빠트리지 않는다. 같이 맞받아 웃긴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북받친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늪을 연달아 헤치고 나온 그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포괄적으로 나의 경향은 변하지 않았지만 구체적 표현의 영역에서의 변화를 수용하게 됐다"고 한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수용했다는 솔직함이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의도하지 않은 표현의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도로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덧붙여 "그것은 인생에 순응하는 인간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2009년 전시를 목표로 현재 진행 중인 그의 작품들의 생기발랄한 색채들은 여전하였다. 도무지 인생의 치명적인 격랑을 겪은 사람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불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을 밝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 화백은 여전히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복무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세에 충실하다.
이태 후 만나게 될 이명미 화백의 전시에선 기존의 '쓰는 그림'에 이어 '소리나는 그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혼자 놀기에서 여럿이 놀기로의 또 다른 실험이자 발전이 아닐까 싶다. 만일 허락된다면 그의 2009년 전시에는 '쓰는 그림에서 소리나는 그림으로, 그림아 놀자'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