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를 만나러 간 날은 무더웠다. 폭서의 계절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의 습도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김민수 교수는 자신을 '유령'에 비유한 적이 있다. 선배교수의 친일을 지적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그는 대학당국에 의해 부당재임용 탈락이라는 고통의 시절을 겪었다. 6년여가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는 부당 재임용 탈락과 관련한 법적 소송을 치러야 했고, 대법원에서 승소한 후 다시 대학으로 되돌아갔다.
디자인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이자 예리한 디자인 문화비평가이기도 한 그는 해직기간 동안 마치 중세의 유배자처럼 연구에 진력했다. 그는 척박한 저널리즘적 상황 속에서도 <디자인문화비평>이라는 개성적인 잡지를 6호까지 출간했고, <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21세기 디자인 탐사> <김민수의 문화디자인> 등의 묵직한 저서를 출간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부당 재임용 탈락과 관련한 법적 소송을 지속해야 했다. 이 시기를 그는 "해직의 화마에서 내상을 입지 않는 길"을 찾고자 했던 시절이라 표현했다.
디자인학자가 본 '이미지맹' 사회
그러나 우리가 디자인 학자 김민수 교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해직교수라는 낙인은 단순히 직업적 거처로부터의 추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학문적·문화적 업적을 포함한 존재감 모두를 히스테릭한 상황에 의해서 과격하게 지워내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러한 폭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교수는 많지 않다. 비근한 예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사건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존재감을 훼손하지 않고, 자신을 단련시키는 일의 지난함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김민수 교수는 <필로디자인>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디자이너는 단순한 상품미학의 매개자나 기능인이 아니라, 현실과 세계 전체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면서 시민적인 양식과 실천에도 투철한 존재'라는 김민수 교수의 디자인관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대화의 입구 삼아 이른바 김민수의 '현실 디자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디자인학자로서 김민수 교수는 스펙터클로 가득 찬 오늘의 현실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문맹'은 사라졌으나 반대로 '이미지맹'은 창궐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대학·학문·정치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할까. 대학으로 돌아간 김민수 교수의 육성을 들어보았다.
김민수 교수 인터뷰는 7월 3일 서울대 교수연구실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인터뷰 후 식사를 했던 서울대 인근 콩나물 해장국 집과 구내 카페에서 2시간 정도의 보충 인터뷰를 나눴다. 인터뷰의 내용은 공식 인터뷰에서 오간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한 부분은 김민수 교수와의 보충 인터뷰 및 이메일을 통해 일부 첨가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디자이너 삶과 철학 속에 물질문명 치료제"
- 최근에 <필로디자인>이라는 다섯 번째 저서를 내셨다. 필로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일반독자 입장에서는 낯설다는 느낌이 든다.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철학을 필로소피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된다. 일반적으로 한국디자인에 철학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약간은 역설적인 의미로 디자인에도 철학이 있다는 맥락에서 <필로디자인>이라는 제목을 지어봤다. 따라서 책 제목의 의미는 디자인에 대한 철학일 수도 있고, 철학을 통해 바라본 디자인이라는 주제가 될 것 같다.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22명의 디자이너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지난 20세기 동안의 디자인 문화를 온몸으로 밀고 나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22명의 디자이너에 대한 '소평전'식 글쓰기인 것 같다. 사실 디자인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면 상품판매를 위한 장식성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디자이너의 시민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평전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디자이너라는 창을 통해 삶과 문화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입체적으로 담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본과 기술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강조하고 싶었다. 나는 디자인을 삶에 대한 약속 행위라고 본다. 도시 건축에서부터 제품과 패션 및 각종 시각 이미지에 이르는 모든 디자인은 사람들 개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약속된 일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디자인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두 유형의 인간 조건을 필요로 한다. 먼저 생산자로서 디자이너의 차원을 보면, 우리 한국사회에서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은 좀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정상적인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매우 다른 식으로 읽혀진다. 예를 들면 지난 수십 년간 변함없이 '환타스틱 퐈숑디자인'을 해온 어떤 의상디자이너의 모습처럼…. 시민사회 속에서 위치되어야 될, 사고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상적인 디자이너의 모습보다는 괴짜스러운 쪽으로 디자이너가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를 건강한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맥락화하는 문제와 함께 그들의 진지한 인생과 철학이 어떤 결과를 창조했는지 그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역할모델을 제공해 줄 수도 있겠고….
소비자의 차원에서, 나는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의 삶과 철학을 소개해서 내면에 잠복된 창조적 자아를 일깨우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즉 디자이너의 삶과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면 소비자로서 일반 대중 역시 주체적인 자아를 지닌 창조적 소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디자인을 장식하고 꾸미는 행위 정도로 이해한다. 요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그렇다. 대부분의 디자인이 럭셔리 코드로 치장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요즘 아파트 광고를 보면, 이건 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매일 밤마다 와인 파티만 하고 사는 사교클럽과 같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런 럭셔리 개념이 우리의 주거문화 속에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장식되고 있다. 또한 모 자동차 광고엔 '대한민국 1%'라는 유치한 광고 카피가 등장해 소비자를 현혹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진짜 1%들이 그런 차가 타겠는가. 최근엔 유명 가수들이 광고한 교복이 70만원 대에 팔려 문제가 되기도 했다.
만일 소비자가 똑똑하고 주체적인 자아가 있다면 이렇듯 쉽게 허위 과장 광고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모습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먼이 말한 <고독한 군중>이 되어가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고독한 군중이 되고 있다. 남들이 소비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된다는 사회적 공포감이 한국 사회 이상으로 높은 곳이 세상 그 어디에 또 있겠는가. 애고 어른이고 얼짱·몸짱 신드롬에, 왕따는 죽음을 의미한다. 리스먼은 대중매체가 발달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고 개인의 개성이나 인격보다 집단 동질성 속에서 안주하려 한다고 말했다. 풍요 속에 고독감과 획일성으로 점차 인간들이 고독한 군중으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인 지향적인 사회현상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낮아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는 인구의 초기감퇴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한데 요즘 한국사회가 바로 이런 상황이라고 본다. 최근 초고속인터넷망 세계 1위 국가가 된 시점에 한국사회는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그 어떤 나라보다도 타인지향형 사회로 변화하는 증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얼짱, 몸짱에서 성형미인과 웰빙의 욕망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모든 사회적 가치관과 기준들이 이에 따라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인터넷 눈팅으로 타인의 블로그를 지켜보고, 남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가 악성 댓글로까지 전개되고, 다시 사회적 시선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의 자살로 이어지고 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소외될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의 공포에 빠져있는 고독한 군중들이 한국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나는 이번 책 <필로디자인>을 통해 우리 한국사회는 이제 물질주의의 욕망으로 자율적 선택이 가능한 창조적 인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갈수록 타인지향적인 사회에서 자율형 인간을 증가하게 하는 한 가지 길은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의 인생과 철학을 학습하는 것이다. 유행과 욕망이 지배하는 소비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적인 스타일이 생명인 디자이너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증의 물질문명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는 그것을 씨뿌린 사람들 즉 디자이너들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들의 삶과 철학을 이해함으로써 타인에 의존하는 소비성향들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쾌락적 소비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만일 타인지향형의 인간이 디자이너들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삶에 대해 끊임없는 발견의 기쁨을 즐길 수 있다면 그는 군중 속의 고독을 줄이기 위해 굳이 유행과 동료집단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비자 자신의 내면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은 가능성이 잠재해 있고, 이 우물을 확인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조작된 마케팅의 제물로 헌납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러한 디자인에 대한 생각은 어디에서 생성되었는가. <디자인문화비평>도 6호까지 작업을 해오셨는데. 서문을 보면 "현실개입, 담론실험, 학제간 연구"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현실과 디자인을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시각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다른 학문분야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늘 고민했던 부분들 중 하나는 디자인에 대한 접근들 대부분이 어떻게 만들고 그리는가의 방법론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방법론적 접근을 하다가 도대체 이것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생산해내고 있는 디자인이 과연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접합이 되고, 그것들이 어떤 식의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들. 그런 사회적 맥락에서의 의문들을 그동안 늘 개인적으로 품어왔다.
결정적으로 디자인을 일상의 삶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유학시절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살면서였다. 도시가 갖고 있는 일상적 공간성이 한 개인과 상호 작용하는 밀도가 뉴욕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대단히 강하다. 디자인이라는 것 자체가 도시에서의 삶과 굉장히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이 자폐적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조형적 행위가 아니라 도시·자동차·인파 속에서 총체적 삶의 문제와 접합된 사유체계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사실 도시건축·제품·각종 상품과 이미지 자체는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때로 굉장히 비일상적으로 다가온다.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데 담겨있어야 할 내용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종종 빈 껍데기의 형식만이 존재하는 공허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자인은 단순히 기능을 패키지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한 디자이너가 건축 공간과 사물과 이미지 속에 담고자 하는 그 무엇, 한 마디로 '내용의 프로그램'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런 내용이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총체적 맥락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귀국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디자인의 역사적 문제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디자인과 시각문화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였다. 분명 이 땅에서 삶의 역사가 형성한 문화적 궤적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잘 다뤄지지 않았고, 과거사의 은폐된 부분들이 있었고, 한국디자인의 역사는 언제나 개발독재체제와 자본주의 산업화의 성공신화 차원에서만 서술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디자인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디자인의 역사와 비평 문제로 확장해 보게 된 것이고."
"나를 부당 해직시켜 유배자로 단련시켜준 분들에 감사"
- 선생님의 저서를 보면, 반복되는 말들이 있다. '몸으로 사유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거의 서구의 학문체계와 방법론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 것들이 실제로 내 몸이 위치한 현실과 접속되지 않는 지점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언어의 문제가 그렇다. 대부분 사용하는 언어들이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들이고, 그것으로 세상을 보았다. 내 몸으로 경험을 통해 체화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부당해직기간 중 서울대와의 문제도 내 몸의 언어를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정신 따로 몸 따로' 식의 이원론적 분리 상태 속에서 학문이 제대로 된 역할과 기능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난 해직기간 6년 반 동안 몸을 움직여 연구를 했다. 그 중에서 비평지 <디자인문화비평>은 비평 부재의 현실에 대해 실천 담론을 만드는 일이었고, 한 때는 신문사의 객원기자로 지방 도시를 직접 취재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그것을 2003년에는 YTN의 방송 포맷으로 1년간 <김민수의 도시문화 탐사>라고 하는 주제로 방송을 한 적도 있는데.
나는 그 시기의 작업이 나름대로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해직교수의 신분이었지만, 몸으로 우리나라의 땅을 이해하는 과정이 그동안에 생각만으로 했던 그런 실천적인 부분들, 생각하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을 결합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 동감이 된다. 해직이 되고 보니 그동안에 피상적으로 사회를 읽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변화가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태도나 의미나 그런 것. 결례가 되는 표현일 수 있으나 해직기간 동안 선생님께서 행위예술을 하신 게 아닌가.
"옛날로 치면 유배자의 팔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그렇고 대개 유배지에서 굉장히 생산적인 작업이 많이 있지 않았나.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해야 할 연구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돌이켜 보면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위치와 생각도 훨씬 더 명징해 졌다. 나를 부당하게 해직시켜 유배자로 단련시켜준 분들과 서울대 당국에 감사한다."
- 몇몇 해직 교수들은 심리적 압박 때문에 본인의 학문적 실천이 공백상태로 남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그에 반해 선생님 같은 경우는 <디자인문화비평> 작업이라든가 여러 묵직한 학술적 작업을 지속해 온 건데 동력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단련시킨다는 의미에서의 태도. 이런 게 있었나.
"절박함과 평상심이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사선을 넘지 않고 중심을 잡는 것이다.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라 절박함. 그러면서도 내상을 입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집중력이 나온 것 같다. 내가 느꼈던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궁극적인 싸움의 대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스럽지만 심기를 추스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집요하게 파 들어가는 것. 그것이 해직의 화마로부터 내상을 입지 않는 길이었다. 따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을 견디기 위해선 끝없이 몸과 정신을 움직여 벼랑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에.
또 하나는 연구실을 잃지 않았다는 거다. 이 부분은 해직교수마다 상황이 다른데, 사립대학의 경우 나처럼 하기는 매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해직된 교수에게는 해당 대학측이 연구실 사용중지 가처분 신청 등의 법률적 압박을 가하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거다. 나 역시 초기에 연구실 퇴거명령이 있었지만, 연구실을 끝까지 지키면서 학문적 투쟁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투쟁을 위해 학문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거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많은 해직교수들은 그 부분의 어려움 때문에 외국에 가서 생업을 버리거나, 최근 석궁사건으로 마음이 아픈 성균관대학의 김명호 교수의 경우처럼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했던 학문적 투쟁을 다른 해직교수들과 일반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수한 상황인 것 같다."
"아톰같은 '포돌이', 일제 도안기법 이어받아"
- 디자인의 역사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국 디자인의 식민성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모 대기업 심벌 디자인이 미국 어린이 학교의 디자인을 차용. 또 88올림픽의 엠블럼 역시 LA 올림픽 엠블럼의 아이디어 차용. 또 한국 미술사 안에서의 친일파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정상적인 학계의 상황이었다면 논쟁이나 논문을 통해 해결될 문제가 법적 소송이나 해직문제와 겹쳐졌던 것 같다. 한국학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떤가.
"결국 이 문제도 우리가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타자의 시선으로 학문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문제의 시발점은 바로 거기서부터라고 본다. <필로디자인>에서 1919년에 설립된 독일 바우하우스의 이야기를 했는데, 바우하우스의 근대성이란 바로 삶의 문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현실적인 주거문제의 해결로부터 독일사회가 갖고 있었던 불안정한 사회정치사적 맥락에서의 자구책이었다. 즉 삶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바우하우스는 과학기술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디자인 이념을 내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근대성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형 활동이 아니라 사회 이념으로서 프로그램과 실천에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 근대의 경우, 과학기술과 디자인은 일제 식민지배의 가시적인 효과를 위한 볼거리, 즉 스펙터클로 이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 합리성이 일상 삶 차원에서 확보되지 못했고, 바로 이 점이 최근에 황우석 교수사건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과학이 생활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과학은 샤머니즘과 같은 주술적인 것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근대의 과학기술은 상품의 신화 속에서 새로운 것 내지는 물질적 욕망의 쾌락과 깊이 유착되고 제국의 시선을 이식하기 위한 식민통치 수단으로 일종의 샤머니즘적 신화가 되어 성찰의 대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대상이 되었던 거라고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과학기술을 일상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보기 힘들고, 종교적 신화와 비슷한 일종의 주술적 물신과 같은 것이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디자인 역시 삶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근대성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일제의 타자적 시선에 의한 도안양식화 기법이 우리에게 식민 미술을 통해 전수되다 보니까,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장식의 효과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한데 일제가 가르쳐준 이 도안기법은 스스로 사고를 통해서 창조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어떤 틀을 요구로 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말로 '혼(本)'은 형태를 뜻하는 '가타(形)'와 매우 밀접한 용어인데, 바로 이것이 일본 디자인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아마 이명원 교수도 옛날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면 노란색 크레파스로 형태 윤곽을 그리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육의 맥락이 일본의 도안양식화 기법 훈련에서 영향을 받아 넘어온 거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관찰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서 있는 '혼(本)'과 '가타(形)'를 틀로 놓고 채색만 하는 이런 식의 디자인이 그동안 한국의 미술교육과 디자인이 의존했던 주된 방식이었다. 예컨대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마스코트 '호돌이'나 일본의 아톰처럼 놀란 눈알의 경찰청 '포돌이'와 같은 넋 나간 이미지들은 이런 방식에 의존해 탄생한 것이다.
참고로 넋나간 디자인이란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의 눈이 개입되지 못하고 형식에 목숨 건 디자인을 뜻한다. 사실은 이러한 시각과 미학의 치유가 말뿐인 과거사 청산보다 우리의 일상 시각문화에서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심지어 친일미술가 김기창과 이유태가 그린 세종대왕과 퇴계 초상이 버젓이 한국은행 만원권과 천원권 화폐에 새겨져 있는 어이없는 현실에서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만, 우리의 불행한 과거사는 역사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학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인 것이다."
- 디자인뿐 아니라 한국 근대학문의 수용사 자체가 사실은 모방, 그러한 반성 없는 모방의 형식이다 보니까. 비유하자면 학계든 현실이든 외래종의 새것이 좋다는 이른바 '웰컴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대학의 학문구조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제강점기 이래 학문 분류체계가 한국 대학에 제도화된 부분이 많다. 어떤 학문분야에서 교과목이란 것이 왜 그런 식으로 가르쳐져야 하는 것인지. 또 학문이 왜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동안 대학에 있으면서 답답했던 부분 중의 하나가 그런 거다. 요즘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학문의 위기,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논의에서 대부분 내용과 결합된 구조가 아니라 내용은 빠진 구조의 문제만이 이야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서 학과통폐합이 문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을 왜 묶여서 어떤 형태의 내용이 만들어질 것인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순히 대학이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 어떤 교육 목표와 내용을 어떤 체제로 학생들을 잘 가르칠 것인가의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한국 대학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얼마만큼 투자와 지원을 더 해야 하는가의 외형적 문제뿐이다. 정작 내재적으로 어떤 교육목표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는지 성찰하고 대안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것은 학문의 위기가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의 위기라고 본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 서울대 정체성 의심케 해"
-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대학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실종현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요즘 미술시장의 붐으로 미술품에 대한 투자가 급증해 대박이 터지고, 디자인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간다는 점에서 디자인을 포함해서 시각예술분야는 인문학 분야와는 달리 르네상스 또는 호황을 맞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똑같은 위기가 있다. 지금 양적으로 팽창되고 산업적 수요만 증대되었을 뿐 내용과 철학의 부재라는 결핍 증후군이 똑같이 존재한다. 겉으로 들여다보면 호황이지만 내용적으론 궁핍하다.
인문학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인문학이 오늘날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인문학은 사회적인 소통의 접점에서 팔다리가 없는 거고(머리는 있되 세상과 접점을 이루는 팔다리가 없는 거고), 우리 디자인이나 시각예술 쪽은 팔다리는 있되 머리는 없는 이런 기형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사실 기존학문을 깊게 파는 전문성의 틀을 고수하더라도, 최근의 바뀌는 미디어 지형이나 매체환경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평적인 통합학문의 세계도 만들어져야 한다. 인문학과 시각예술이라든지 다른 과학기술과 접합될 수 있는 학문분야의 논의과정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지금 그 점에서 보면 그동안 인문학은 수직적 깊이만을,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것도 제대로 파들어 가지도 못하면서 수평적인 소통의 너비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가 인문학의 위기의 한 측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또 디자인과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그동안 예술이라는 것을 하나의 기예적인 측면에서만 다뤄왔고, 특히 미술 같은 경우는 도제식 전수과정으로 이어져, 현대예술에서 말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측면이라든지 다양한 세상의 문화와 접점을 이루는 소통의 단절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근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학문구조라는 것이 이런 식의 변종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잘못된 부분을 어떻게 치유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가의 고민들이 대학에서 해야될 본질적인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서울대에 들어오면서 근대법학100주년기념관이 있는 것을 보니, 서울대가 그 모태를 경성제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낯선 느낌도 있었다. 최근의 서울대를 둘러싼 몇몇 문제를 보면 서울대가 갖고 있는 양적 팽창이 위기의 임계점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난 3월에 서울대병원이 1907년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해 설립한 대한의원이 백주년되었다고 기념행사를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서울대학교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라고 본다. 서울대학교는 1946년에 설립되었기에 공식적으로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기념하지 않는다. 이렇듯 서울대가 경성제대를 역사적 자산으로 여기지 않듯이,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탄생한 대한의원을 서울대병원이 기념하고 계승할 수는 없다.
이렇듯 서울대 내부에서 계속해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 한다면 국립대학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가 해온 순기능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서울대가 어떤 시선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내부의 자성적 고민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본다."
"산업에 발목잡힌 디자인, 자유롭게 놀게 하라"
- 한국의 산업디자인, 공업디자인이 활성화된 계기가 박정희 시대라는 건데. 오늘의 디자인에 대한 대중적 관점이나 학생들이 디자인에 입문하게 되면서 갖게 된 통념적 시각에 이것은 일종의 악연이 아니었나.
"그동안 한국의 산업디자인은 주로 관제 차원, 즉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어 디자인 본래의 근대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목표와는 거리가 멀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지난 1960년대 초에 시작된 박정희 군부독재체제 속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수출입국을 통해 보릿고개 탈출기로 쓰였으며 파시즘적 요소를 지닌 불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었다.
군부 유신독재가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의 역행이라는 빛과 그림자를 남겼듯이, 1960년대 이래 교육과 실무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한국의 디자인은 산업적 부가가치를 효과적으로 높이는 수단이었지만 최소한의 공공적 담론과 실천조차도 확보하지 못한 상품치장술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디자인은 관 주도 대신에 다양한 기업 활동 차원에서 다원화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지금은 개발독재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형태를 달리하는 또 다른 문제들이 잠복해 있다. 최근 전 학문분야에 공통으로 요구하고 있는 산학협동이라든지 기업의 맞춤형 교육체제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디자인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일찍이 국가산업적 요구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디자인 분야의 역사를 요즘 다른 학문분야에 연결시킨다면 나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 이후에 대학이 자꾸 기업형으로 변해 가고 있는데. 장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 기업의 전략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호흡이 짧다는 것이다. 앞으로 30~40년 후를 바라보면서 장기적 시선에서 기업을 경영해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삼성이나 LG처럼 대기업들의 경우야 장기 비전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기업의 호흡은 짧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기업형으로 맞춤화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대학과 기업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즘 대학도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육상경기에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종목이 있듯이, 경기 운영방식과 선수 훈련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디자인 분야는 그 어떤 분야보다 정말로 창의성이 요구되는 분야다. 현재 기업 생산 활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술개발과 시장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통시적 안목과 성찰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성 교육은 호흡이 짧은 기업 인력 수급 차원으로 이루어지면 되레 창조성의 약화를 가져온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한 좌표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창조력이 배양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의 창조적 교육이 기업에 속한 사내 디자인 센터 식의 교육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대학이나 기업에 모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말 창의적인 인재는 충분한 성찰과 여유로운 놀이감각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일본에 게임 개발회사 닌텐도가 있다. 닌텐도에서 각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업무란 각자 부스 안에서 자기 맘대로 놀게 하는 거다. 다른 기업에서 써먹고 폐기한 방법론에 목을 매고 게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은 한 개인이 동기유발에 의해 스스로 창조적일 수 있는 기업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오히려 대학에서 진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창의적일 수 있는 동기유발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대학에 대해서는 학생이고 교수고 모두가 냉소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대학이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자신의 잠재력을 퍼올릴 수 있는 창조적인 곳이 된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창조적이지 못한 기업문화가 요구하는 그런 시스템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 그건 자살 행위인 것이다. 지금은 대학이 창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주도권을 기업에 내 준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신자유주의 정책에 발 빠르게 부응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의 창조적 지성을 훼손시킬 여지가 많다. 지금 한국의 고등교육체제에서 구조적으로 모순인 것 중의 하나는 전문대학이 152개나 존재하면서 4년제 대학을 전문대학 차원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현재 152개 전문대학의 입학정원은 24만7천여명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전문대학이 지향하는 교육목표를 보자. 그 역할은 산업사회에 요구하는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다. 요즘 4년제 대학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요구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전문대학은 현행 전체 고등교육의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서 전문대학이 엄청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4년제 대학을 포함해서 전 대학에 획일적으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건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최근 4년제 모 대학에서 '휴대폰 학과'까지 신설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제 대학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듯싶다. 그런 것은 2~3년제 전문대학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앞으로 'TV학과' 'PDA학과' '냉장고 또는 밥통학과'까지 만들 것인가. 도대체 기업의 제품디자인실은 뭐 하는 곳이고, 대학은 또 뭐 하는 곳인가.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이런 제안을 해본다.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을 아예 뒤바꿔버리는 것이다. 지금의 4년제 대학을 전문대학처럼 기업에 맞춤형 대학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체 고등교육의 5분의 2 정도 즉 전문대학 정원 규모만이라도 충분히 성찰하고 창조적인 지성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자본의 권력과 지배가 미치지 않으면서 대학 본연의 지적 해방구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할 수는 없겠는가. 어떻게 국가의 대학 전체를 획일적으로 기업의 톱니바퀴 속에 밀어 넣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20세기 산업사회에서 지구의 원시림은 단지 개발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가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속에서 뿜어 나오는 한 줌의 산소가 더욱 절실해 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자본의 지배와 권력에 물들지 않는 천연의 지성력으로 산소 같은 지식과 학문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아쉬워지는 때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본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급조된 산업화의 여파로 긴 호흡을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고 붕어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지 정치'가 아니라 '이미지맹'이 문제"
- 우리 사회와 대학의 구조가 기업에 의해 많은 부분 식민화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들 역시 자신이 창의적이고 비판적 사고에 목마르다기보다는 기능적인 차원에서 대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 듯 하다. 단순하게 환경에 의해 대학이 훼손되는 측면도 있지만, 학생과 교수를 포함한 대학 내 주체 자신의 반성도 필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시대에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 못지않게 인문학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통찰력이다. 또한 이 모두는 문화예술과 접점을 이뤄야 한다. 한마디로 요즘 시대는 멀티미디어적 지성과 감각이 요구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존의 수직적인 깊이를 파 들어가는 학문영역의 본령은 그대로 놔두더라도, 그런 접점을 형성해나가는 학문의 형태 내지는 포맷을 달리하는 형질들이 나와야 된다.
예를 들면 인문학의 경우 어문, 역사, 철학도 과거에 해왔던 수직적 깊이를 천착하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의 수평적 너비 확보에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학문의 세계는 고전적인 텍스트 위주의 학문과 새로운 이미지 학문이 두 축을 이루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두 학문 사이를 갈등관계로 파악하고 있는데… 일단은 기존의 인문학이 미디어의 언어체계와 생태계에 좀 더 친숙해지면서 소통해나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요즘 학생들의 경우는 과거에 이전 세대들이 익숙했던 텍스트 위주의 학문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다. 따라서 후속 세대들의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 주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담론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는 새로운 언어와 매개체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님 말씀대로 대학구성원들도 반성이 필요하다. 자기가 하지 못하면 남을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맡겨서라도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 학문 분야의 폐쇄 시스템은 일체의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못하니 너도 할 수 없다. 뭐 이런 식이다. 무엇보다 병폐 중의 하나는 대학을 공교육 또는 공개념 차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소유개념으로 본다는 점이다. 원로교수들은 학과를 마치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역할분담을 하면 되는 건대, 내가 못하는 것은 남도 못하게 하는 폐쇄성이 대학에서 열정을 사라지게 한다. 사실 역할 분담의 문제일 뿐인데 문제를 자꾸 악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말씀드린 이미지 학문의 출현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지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선 이미지를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갖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이미지 리터러시, 즉 독해력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필로디자인>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사회에서 이미지 정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미디어에 노출된 모든 정치인은 다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말과 글을 통해 한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바라보는 창도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사람의 말과 글은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진실 여부를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도 또 다른 언어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한 정치가의 이미지로 그 정치가가 갖고 있는 생각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미지 독해가 거의 안 되는 수준에 있는 것 같다. 일단 이미지를 다 사악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에, 이미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차원에서 소통되는가의 문제를 잘 보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학문영역 있어서도 이미지 언어들이 어떻게 작동되는가에 대해서 더 면밀하게 바라보았을 때, 그것을 언어적 수단으로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대안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지를 사악하게만 보고 자꾸 금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대학 내의 학문 구조에서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 C.P. 스노우의 '두 문화'라는 개념도 생각난다. 시각문화와 기존의 인문학 사이의 상호오해 또는 자기 영역본능이 구조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지 독해의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듯한데, 그것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스노우가 1959년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란 강연 제목에서 발의한 두 문화 논쟁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심화된 단절현상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인문학 사이에 그러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인데, 사실은 시각예술과 인문학의 관계는 스노우의 두 문화 논쟁과 좀 다른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17세기 이래 근대 인문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적 길드에 속한 일개 장인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인문적 성찰을 통해 미술 아카데미를 성립했고,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신활동으로서 시각예술이 출현했던 것이다. 즉 시각예술은 인문적 성찰을 통해 예술의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인문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일제에 의해 서구학문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잘못 오독된 것이고, 어떤 점에서는 과거 조선시대보다 퇴화된 인식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문인들은 예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글을 쓰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은 <산중신곡>과 <고산유고>와 같은 문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직접 거문고를 제작해 사용한 악기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는 거문고 제작과 사용법을 직접 수록한 책 <회명정측>과 악보를 기록해 놓은 <낭옹신보>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유실하고 마치 시각예술과 인문학이 두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통마저도 잃어버린 이상한 학문세계에 갇혀 있는 꼴인 셈이다.
글을 못 읽는 것을 문맹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미지맹'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문맹과 같은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자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미지 언어에 대해서는 독해가 거의 안 되고 있다. 바로 이점이 예를 들어 청계천 복원사업에서도 잘 드러났다. 실제로 청계천에서 복원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한강물 펌프로 퍼올려 분수대처럼 물 흘려 내보내고 풀 심어 '짝퉁' 녹지공간처럼 조성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청계천을 보러 마치 인형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조립되는 인형들처럼 구경을 가는 것은 일종의 도시적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도시 내에 풀 심어놓고 물이 흐르게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도심녹지 공간으로 생각한다. 만일 양화대교 옆의 선유도 공원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청계천복원사업과 선유도공원사업 사이에 무엇이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복원사업은 사람들이 메마른 도시공간에서 얼마나 녹색 풀을 그리워하는지 강박관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가는 듯한 청계천에서 어떤 사색을 할 것인가. 그저 도심공간에 물이 흐르고 풀이 있으니 좋다는 단순한 발상도 이미지맹이 빚어낸 한 현상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포섭하고 있다. 일상 속의 광고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소비자들의 이미지 독해가 충분하지 못하니 과장, 사기성 광고에 속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독해력이라는 차원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에서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이미지 독해력의 차원에서 일반인도 디자인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에겐 디자이너 교육만큼이나 소비자 교육도 중요하다."
"70여년 문자 갇힌 이상... 범학제간 연구 필요"
- <필로디자인>에서 식민지 시기 이상의 시에 접근하는 시각이 놀라웠다. 기존의 국문학자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 해석들이 있었지만, 기존의 문자텍스트 중심의 훈고학적 독해였다. 인문학자들의 발상법에 대해 반성하게 만든다.
"이상이 정말 천재인 것은 그 암울한 식민지 경성 땅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도래로부터 새로운 자아에 대해 고뇌를 했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독해가 안 되고 몰랐기 때문에 단순히 천재라는 수식어를 이상에게 붙였던 것 같다. 이상은 죽은 지 70여년 넘게 문자텍스트 속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그의 시가 독해되는 지점은 이미지 텍스트로 읽혀지는 곳이다. 서울대에서 해직되고 나서 외국학술지에 이상 관련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쪽에서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쉽게 이상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을 보며 매우 흥미로웠던 적이 있다.
그것은 이상의 작업이 전혀 엉뚱한 난수표가 아니라 건축이라든지 19세기 이후에 나오게 되는 상징주의 시 계열에서의 시각시의 전통, 예를 들면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 다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문맥들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부분이 있어 그쪽에서는 쉽게 읽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문학적 텍스트로 가둬놓고 이상을 보려 했으니 이상은 모르기 때문에 천재가 된 거였고, 난해한 천재로만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부분이 우리 사회에서 학문한다는 것의 문제점이라고 본다. 과학기술은 여전히 일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주술처럼 신화화되고, 인문학은 위기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있고, 예술은 여전히 예술의 전당과 미술관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일상과 거리가 있고, 디자인은 세상과 너무나 가까운 공간, 제품, 이미지를 다루고 있음에도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판타지만을 부추기고 있는 점이 그렇다.
나는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범학제간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앞으로 학문이 기존에 했던 것을 모두 폐기해 버리고 학제간의 연구형식을 취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수직적인 깊이를 추구하는 학문의 중요성만큼이나 접점을 형성하는 너비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학제간의 연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학제간 연구란 A와 B라는 학문을 단순히 병치시켜 AB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C라는 새로움을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연구자들 내부에서 화학적 변화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인식틀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자체의 구조가 어느 부분에서는 열려져야 한다. 지금과 같은 폐쇄구조의 학문구조에서는 그런 교육을 해나갈 수 없다. 요즘 학생들은 오히려 학교 밖에서 뒤섞여진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내의 전공 공부에서 스스로 동기유발 하지 못하고 강의실에서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폐쇄구조의 당구공과도 같은 결정구조로 이루어진 학문구조를 어떻게 리퀴드 메탈(액체 금속)과 같은 상태의 내용과 만나게 할 수 있을지 대학이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을 주체적으로 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대학의 자율성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 실제로 학제간 연구에 대한 관심이 활발한 것은 대학 외부의 공동체 아닌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대학 내에서도 만들어져야 한다."
"한강 르네상스계획, 디자인으로 용어만 바꾼 개발주의?"
- 디자인학자의 입장에서, 도시계획과 친환경적 개발 공약을 포함한 정치적 기획과 관련해 우리 삶의 공간이 재편되고 있는 풍경을 볼 때의 느낌은 어떤가?
"어원적으로 디자인(design)이란 용어는 상징(symbol) 또는 사인(sign)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개념을 뜻한다. 쉽게 말해 디자인은 한마디로 삶을 약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약속이 될 수도 있고, 도시계획 차원의 약속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점에서 우리 삶의 전체에 걸쳐 디자인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약속이 삶을 어떻게 틀 지울 것인가에 대해 정말 신중하게 성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핵폭탄이 터지면 인류는 일순간에 몰살하지만, 만일 디자인이 잘못되면 사회구성원들은 서서히 피가 말라 죽게 된다. 따라서 잘못된 약속은 하지 않은 만 못할 수도 있다."
- 일본의 한 비평가는 자연생장적 도시를 논하면서, 근대도시의 기능성 중심의 계획도시가 오히려 도시를 폐쇄적인 공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방식의 환경, 생태 개념이 도입된다고 할지라도 개발주의는 결국 우리 삶의 방식을 훼손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냐. 또 오늘의 개발주의와 도시계획이 장소의 역사성을 제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맞는 말씀이다. 단순히 디자인이 정치나 도시공간에 투입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주체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잘못된 디자인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 디자인은 선의를 갖고 사용하면 선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악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원래 건축가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건축가가 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총애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총애를 받아 군수장관까지 역임했고 전후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법정에까지 섰었다. 그가 바로 총통관저에서부터 '게르마니아'라는 베를린 도시계획, 즉 제3제국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야심찬 도시계획을 한 디자이너였다. 이처럼 디자인이 사이코 독재자의 세계제패라는 의도와 만났을 때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 제3제국의 자폐적인 도시건설까지도 진행될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은 단순히 시행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식의 철학이 담겨 있는가가 중요하다. 최근 서울시가 서울을 디자인도시로 거듭나게 한다고 한강 르네상스계획까지 발표했다. 이는 시민들에게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개발독재시대의 건설과 토건의 개발주의를 용어만 디자인으로 세련되게 바꿔 놓은 것이 아닌가 싶어 솔직히 우려가 된다. 그동안 한국의 디자인은 청계천복원사업에서 드러났듯이 말로는 복원을 외치지만 역사적 장소성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누적된 시간의 켜로부터 형성된 도시를 생각한다면 황학동과 입정동 일대 또는 동대문 인근의 삶들도 고려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초고층 주상복합의 개발주의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도시의 역사와 삶의 장소성을 지워버리면 도시는 그저 빈 껍데기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의 대도시들이 기억상실증의 중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다. 장소성이란 어떤 건축 이론가가 '땅이 갖고 있는 영적인 혼'이라고 말했다. 그런 장소성을 훼손하고 마구잡이로 도시를 개발했을 때의 위험성은 고층건물의 화려한 도시이미지 이면에 마치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작동되는 병리현상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디자인을 단지 도시와 삶에 분칠하는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떻게 약속할지 감시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다가올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을 약속하는 그랜드 디자인이 대선이니까…."
- 이후의 작업은 무엇인가?
"복직하고 나서 작년 겨울부터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에 하지 못했던 것을 저서로 준비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 때 가을쯤에 나올 책을 쓰고 있다. <디자인문화비평>은 워낙 공이 많이 들어간 작업이라, 다시 복간을 내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교수의 소신과 양심,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살았으면..."
- 김명호 교수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나는 해직기간의 외상 후 스트레스로 요양이 필요한 사람인데 다시 김명호 교수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두고 정이 많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참으로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어떻게 그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석궁을 든 행위는 분명 잘못되었지만 유능했던 한 사람의 수학자를 어떻게 그렇게 망가뜨릴 수 있었는지 원인과 본질에 대해 성찰해야 봤으면 한다.
애초에 김명호 교수 사건의 본질은 수학문제 오류를 은폐하려 했던 성균관대학과 관리감독기관으로서 교육부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힘없는 개인으로서 김명호 교수는 비겁한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려 마지막 희망으로 법에 호소했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수학문제의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억울함의 본질에 귀 기울이기보다 사건을 형식적인 법리논쟁의 문제로 단순화시켰고,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나 김 교수의 인성문제를 무리하게 거론해 성균관대학과 교육부가 떠맡아야 할 책임을 대신 떠안아 버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사법부로서는 괘씸해서 김 교수의 행위를 엄벌에 처해 권위를 회복하려 하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사법부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 이면의 모순구조에 눈을 돌려 김명호 교수의 형사적 책임을 최대한 선처해주고 지위확인을 전향적으로 해결해주길 호소한다.
형식적인 법리 다툼에 앞서 양심있는 교수로서 책무를 다했던 피해당사자가 억울하게 성균관대학에서 내몰리고 해외로 떠돌며 받았을 정신적 고통을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 가정이 파괴되고 한 인간이 극단으로 내몰리고 있을 동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으며, 그 억울한 사정을 살피고 보호해야 할 사법부는 무엇을 했는가. 또한 가해자인 성균관대학 당국과 해당 학과 교수들, 그리고 관리 책임자인 교육부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가 김명호 교수와 같이 부당하고 억울하게 해직된 교수들을 오히려 법의 이름으로 내쳤을 때, 호소할 곳조차 없는 그들의 분노와 절망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김명호 교수는 단순 상해혐의로 기소되었음에도 아직까지 구치소에서 6개월째 수감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사법부는 김명호 교수에 대해 따뜻한 사법정의의 시선으로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사법부가 나의 부당해직 사건에 대해 상식의 손을 들어줘 내가 강단에 복귀했듯이, 김 교수를 조속히 석방시키고 지위확인 소송에서 그가 강단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상식의 편에 서주길 간청한다. 이명원 교수님도 부당하게 재임용탈락하고 본안 소송 1심에서 승소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교 측의 항소심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 대학에서 소신과 양심을 갖고 교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