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일천 칠백명의 고려군에게 사로잡힌 거란군은 육천이 넘었다. 게다가 곽주성 안에는 거란군에게 사로잡혀 있던 백성의 수도 칠천이 넘어 얼마 되지 않는 고려군으로서는 통제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양규는 단호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도거와 달치!”
“예!”
“사로잡은 거란병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려라!”
“알겠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보급이 부족한 측이 사로잡은 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지 못할 바에는 목을 베어버리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유도거와 김달치는 큰 칼 수십 자루를 벼려두고 거란군의 목을 칠 병사들을 뽑았다.
“장군! 이건 아니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뒤늦게 달려온 이랑이 양규를 만류하고 나서자 양규는 물론 병사들까지 이랑을 이해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이유인가?”
“지난 통주의 패배로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고려의 병사와 백성들이 수만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수천의 거란병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그들이 무사하겠습니까? 장군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소서.”
이랑의 진언에 양규는 잠시 갈등이 생기는 듯 말을 않고 있다가 거란포로들을 둘러 본 후 단호하게 말했다.
“내 여기서 맹세하건데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 거란놈들이 우리 백성들을 해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구해낼 것이네. 지금은 이들을 끌고 다닐 여력도 없으니 내 명에 따르게나!”
이윽고 거란 포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매웠다. 곽주성 본청 가운데로 끌려 나온 거란 포로들의 목은 고려병사의 칼날에 차례로 목이 떨어졌고 이 목불인견(目不忍見 :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음)의 참상은 거란포로들의 목을 베는 고려병사들이 교대되면서 반나절 동안 계속되었다. 묶인 것을 몰래 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거란군 포로도 있었지만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랑 게 있소?”
거란병의 참살이 거의 끝나가는 와중에 유도거와 김달치는 술병하나를 들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랑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오?”
“곽주성의 창고를 거란놈들이 군량과 무기로 꽉꽉 채워놓았더이다. 게 중에 술독도 보여서 내 조금 가져온 게요.”
“술은 입에 대지 않소.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물러가시오.”
이랑은 차갑게 대답했지만 유도거와 김달치는 물러서지 않고 손에 든 반합을 바닥에 놓았다.
“술을 자시지 못한다 해도 이건 드시오. 곽주성 본청 연못에서 이놈을 건져 삶아 온게요.”
김달치가 반합을 열자 안에는 삶은 잉어 두 마리가 김을 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랑의 굳은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김달치는 반합을 이랑 앞으로 밀어 넣으며 먹을 것을 권했다.
“자 여기 젓가락이 있으니 한번 자셔 보시오. 허허허.”
“혼자 있고 싶다 하지 않았소!”
이랑이 신경질적으로 김달치의 손을 확 뿌리치는 바람에 젓가락이 날아가고 삶은 잉어를 담은 반합이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일에 이랑은 저도 모르게 ‘앗’하는 소리를 질렀다.
“먹지 않을 거면 관두시오!”
유도거가 크게 화를 내며 휭하니 나가버리자 이랑은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안하오! 내 이러려고 한 짓이 아니오!”
당황하며 사과하는 이랑을 김달치가 달랜답시고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소. 이런 거야 다시 주워 담으면 되는 일인데 내 친구가 워낙 째마리(사람이나 물건 가운데 가장 못된 찌꺼기)라 그런 거니 이해하시오.”
“째마리라니 농이 너무 심하오.”
이랑의 검기만 했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슬쩍 붉어져 있었다. 김달치는 그런 이랑을 보기 어쩐지 어색해져 반합을 챙겨들고 슬며시 먼저나간 유도거를 찾아 따라 나갔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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