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밤은 길고 갈 곳은 없다. 사람들은 오후 5시면 집으로 간다. 마땅히 찾아갈 곳은 대형 할인마트 뿐, 밤마다 뭔가를 샀다. 손톱깎이를 사고, 짐을 꾸릴 때 쓰는 테이프를 사고, 한 개를 먹으면 지구를 빛의 속도로 일곱 바퀴 돌아야만 살이 빠진다는 마시멜로를 샀다. 허전한 날은 뉴질랜드 대표 음식인 키위와 녹색 홍합을 사러 갔다.
우리는 뉴질랜드에서 1년쯤 머물며 여행할 사람들처럼 느긋해져야 했다. 사흘을 묵었던 로토로우의 모텔 '맨하탄' 사장님이 저녁밥을 먹으면서 마오리 공연을 볼 수 있는 호텔에 가 보라고 알려주었다. 밤마다 공연은 열리지만 단체 손님들이 많아서 예약을 했다. 호텔은 노천 온천부터 모텔과 격이 달랐다.
개인 여행자들은 따로 앉았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을 썼다. 공연을 보러 온 한국인 단체 손님들의 테이블에는 김치가 있었다. 내가 김치를 주문하면, 우리와 같이 앉은 외국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 몰래 '굴욕 사진'을 찍어 그네들의 블로그에 올릴 것 같았다. 작은 누나는 김치를 갖다 달라는 당연한 주문을 했다.
내 옆에는 모녀가 앉았다. 딸은 < CSI 마이애미 >편에서 해변을 거니는 여자 역할을 해도 될 것처럼 생겼다. 우리 아이와 나는 예쁜 여자 옆에 앉아서 신기하고 기분도 좋았다. 거기다가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먼저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미녀 아가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나라라고 했다.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 안다고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마오리들은 뉴질랜드로 몰려오는 유럽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마오리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모른다. 내 얼굴은 서구화와 거리를 둔 동양적인 얼굴,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뚱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대서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나도 당신 나라를 모르는데…."
"모른다고? 보스턴과 뉴욕 사이에 있는데?"
우리나라는 마음 상했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 그래서 한이 많은 나라. 나는 타고난 풍토성을 팽개치며 "당신은 내가 사는 군산시 나운2동을 알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옷매무새만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나한테만 들리게 "진짜 우리나라를 모른대?" 했다. 곁눈질로 보니 조카 현기는 호주에서 온 쌍둥이 자매랑 얘기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마치 맞게 공연을 시작했다. 마오리들의 노래와 춤은 노래방에서 듣는 '달 타령' 같았다. "1월에 뜨는 저 달은…" 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어쩌면 저런 노래를 골라서 부를까 싶다. 그런데 달 타령이 7월, 8월로 넘어갈 즈음이면 노래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새 일어나서 노래를 따라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마오리 남자들이 추는 '하카'와 여자들이 추는 '포이'. 마오리들은 공연을 보던 사람 중 몇을 무대로 데려갔다. 나도 뽑혔다. 볼 때는 쉬웠는데 솜으로 만든 공 포이를 리듬에 맞춰 돌리는 건 어려웠다. 마오리가 아닌 남자 사람들이 혀를 내밀고 눈을 부라리는 하카를 따라하는 모습은 어색해서 웃음이 났다. 도무지 위력 과시로는 보이지 않았다.
공연 보기 위해 신발 벗는 행동은 며칠 만에 먹는 김치 맛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로토루아에 있는 마오리들의 요새촌 와카레와레에서 다시 마오리 공연을 봤다. 옷을 따뜻하게 입었는데도 비가 와서 자꾸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이었다. 마오리들은 자신들이 원래 살던 집보다 훨씬 크게 지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네들은 맨발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망토를 둘렀다.
마오리들은 원래 1000년 전쯤에 열대의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와서 정착했다. 그네들은 계절이 바뀌다는 것, 날씨가 추워진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을 지도 모른다. 그네들은 후손들에게 삶의 방식을 더 열심히 가르쳤을 것이다. 짐승 털로 망토를 해 입고, 온천이 펑펑 솟고, 지열만으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로토루아를 떠나지 말라고.
마오리들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식을 진행했다. 공연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 중에서 대표 한 사람을 뽑았다. 대표가 된 사람은 마오리 여인과 마오리 인사 '홍이(Hongi)'를 나눴다. 홍이는 악수 하면서 서로 코를 맞대는 인사다. 저쪽 마오리 집에서 대장 마오리가 나와 떨어뜨린 펀(fern, 고사리)을 관광객 대표가 주워들자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내하는 마오리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고 알려줬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며칠, 우리는 신발을 신고 벗는 경계가 없는 숙소에서 머쓱했다. 아이는 침대까지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했고, 조카 현기는 작은 누나와 내가 신발을 벗어둔 현관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신발을 벗는 행동은 며칠 만에 먹는 김치 맛이었다. 개운했다.
관광객 대표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공연을 앞둔 마오리들과 다시 홍이를 나눴다. 어른들은 의자에 앉고, 어린이들은 무대 앞의 바닥에 앉았다. 테이블에 음식을 두고 공연을 보던 호텔과는 느낌이 달랐다. 야성이 있었다. 사람들이 공연에 빠져드는 속도도 달랐다. 여름날,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둠벙'에 뛰어들던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마오리들의 노래는 낯설지 않았다. 옛날 드라마에서는 젊은이들이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부르던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은 마오리들의 노래다. 마오리들의 노래를 뉴질랜드에 정착한 백인들이 따라 불렀다.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온 뉴질랜드 병사들은 고향과 부모님이 생각나면 '연가'를 불렀다.
호텔 공연 때처럼 관광객들은 포이와 하카를 따라했다. 나는 솜이 든 공을 들고 부드럽게 춤추는 포이 보다는 상대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혀를 길게 내미는 하카를 배우고 싶었다. '메롱'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인지는 잘 안다. 어린 날 우리 자매들의 싸움은 혀 내밀기로 시작해서 육탄전으로 끝날 때도 있었다.
조카 현기도 학교에서 럭비시합을 할 때 하카를 한다고 했다. 키위(뉴질랜드 백인)든, 마오리든, 유학생이든, 뉴질랜드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하카. 아무리 봐도 마오리가 아닌 남자들이 혀를 내밀고 눈을 크게 부라리는 것은 웃기기만 했다. 본디 뜻을 살리기 위한 하카는 마오리들처럼 웃통을 벗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모텔 '맨하탄'의 사장님은 뉴질랜드 국가대표 럭비팀 '올 블랙(All Black)'의 의식도 하카라고 가르쳐줬다. '올 블랙'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카를 추며 상대팀을 압도한다. 뉴질랜드에 살러 온 백인들은 마오리들을 무작정 억누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뉴질랜드의 '올 블랙'은 신의 어여쁨을 받아서 세계 최강의 럭비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 해밀턴, 로토루아, 타우포, 파머스턴 노스를 랜터카로 다녔습니다. 글에 나오는 작은 누나는 우리 아이의 고모, 제게는 시누이입니다. 그러나 시누이와 올케라는 호칭이 조금 서럽게 느껴져 저는 작은 누나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