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전북 완주군)을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운동 부족을 절감하게 된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다. 헉헉거리는 몰골이 싫다. 언제 이렇게 추락하였을까? 분명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였는데, 이 모양이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친 숨을 돌리기 위하여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니, 눈에 들어오는 물방울이었다.
계곡에는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비가 내려 수량이 늘어났다. 물소리는 얼마나 청아한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는 물을 바라보면서 어제와 오늘을 생각한다. 언제나 오늘만을 살아왔다. 과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내일을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를 잡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오늘이었다.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힘을 총동원하였지만 언제나 역부족이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로 인해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볼 틈을 가질 수 없었기에 늘 쫓기듯 살아왔다.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과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서 나를 들여다본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뛰었고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비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후회만이 파도가 된다. 잘한 일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일 뿐이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많다.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핑계를 되겠지만 그들 또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들은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분류가 된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와는 전혀 생각이 없다. 기억의 편린들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나눠진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분명 편견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둘로 갈라져버리는 것을. 갈등이나 애매한 점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진다는 것이 놀랍다.
오랫동안 기억될 사람과 잊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호, 불호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물론 주관적이다. 생각의 주체가 바로 나니, 나를 중심으로 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지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 기준은 바로 나다.
빨리 잊어야 할 사람은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밤늦도록 잠 못 이루게 하는 사람이다. 생각만 하여도 머리를 복잡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단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탓을 돌리고 싶은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반대로 오랫동안 기억될 사람은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이기심을 채우는데 일조를 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고맙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싶은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나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 모두 다 다를 것이 없다. 내 안의 욕심을 비우면 해결이 된다. 욕심을 회향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다.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이 그 것을 말하고 있다. 흘러가고 있는 계곡물이 그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꿔진다.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난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전북 완주군 모악산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