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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로의 동굴집 방안 풍경
ⓒ 이승철

"이곳도 가난한 달동네구먼!"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 시절에 가난했던 마을이 지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로구먼, 2천 년 동안이나 가난이 대물림되다니, 그야말로 비극의 현장이로군."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 마을은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모습이었다. 마을 이름처럼 베다니 마을은 온 동네가 가난한 풍경이었다. 골목길 좌우로 늘어선 주택들은 가난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꾀죄죄한 몰골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몇 가지 물건들을 손에 들고 우리 일행들을 따르며 "원 달러!"와 "천원!"을 외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서글픈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장벽 안쪽에 갇혀있는 동예루살렘에서 예수탄생교회와 우유교회를 둘러본 일행들은 근처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다. 나사로의 무덤은 마을 안길 옆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무덤 입구에는 나사로의 무덤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고 무덤의 위쪽은 역시 나사로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들러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낸 기적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놓은 기념교회였다.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에 의해서 되살아난 그 기적의 현장인 나사로의 무덤은 교회에서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길가의 동굴이었다.

▲ 골목길 옆의 열매가 빨갛게 익은 오렌지 나무
ⓒ 이승철

▲ 나사로의 동굴무덤입구
ⓒ 이승철

물론 이곳이 정말 2천 년 전에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불러낸 그 무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굴 무덤 입구로 들어서자 머리와 허리를 숙여야만 할 정도로 아주 낮은 동굴이 이어지고 그 동굴을 따라 들어가자 막다른 곳에 두어 평 정도의 작은 방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죽은 나사로가 사흘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동굴이 과연 그 때의 그 장소인지 진짜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성경에는 예수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려내어 불러내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1장 43~44절)


골목길 나사로의 동굴무덤 입구 맞은편에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다자매가 살던 곳이라는 역시 작은 동굴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 동굴집은 나사로의 후손이라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5달러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가 동굴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동굴집은 그 당시의 가옥구조를 그대로 재연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다만 좁은 방안에 놓여 있는 탁자와 몇 개의 그릇들,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허술한 성화 한 점이 전부인 초라한 모습이었다.

▲ 나사로의 동굴무덤 위에 세워진 기념교회
ⓒ 이승철

▲ 방안의 벽에 걸린 성화
ⓒ 이승철

나사로의 집에서 방안구조와 집기들을 살펴보면서 당시의 베다니 사람들이 어떤 방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주방형태를 갖추고 살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초라한 집안은 사실 별로 구경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방 한 개와 작은 거실, 그리고 역시 작은 주방 한 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이 지역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알 수 없어 비교는 할 수 없었지만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방안과 주방을 잠깐 돌아본 다음 한두 명씩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남자 일행들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뒤늦게 여성 일행들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나사로의 후손이라는 청년이 두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고 입구를 막아선 것이다.

"파이브 달러!" "파이브 달러!"

청년은 이렇게 외치면서 손가락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1인당 5달러씩을 내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현지 가이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일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여성일행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여행사 가이드가 나섰다.

"무슨 말이냐? 관람료는 미리 지불했는데 무슨 돈을 더 내란 말이냐?"고 따지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입장할 때 받은 5달러는 1인 관람료라는 것이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도 5달러씩 더 내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것이었다.

▲ 허술한 동굴집 천정
ⓒ 이승철

▲ 탁자와 집기 소품들
ⓒ 이승철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난감한 순간에 젊은 여행사 인솔가이드가 재치 있게 치고 나왔다. "무슨 소리냐. 이건 약속 위반이다. 내가 이곳을 벌써 몇 번째나 왔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당장 경찰을 부르겠다"고 큰소리로 항의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경찰이라는 말에 청년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에 기가 꺾인 것이었다. 청년이 반응을 보이자 인솔가이드가 다시 한 번 더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다. 청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섰다.

가난이 빚어낸 서글픈 풍경이었다. 2천년의 가난을 대물림한 이 나사로의 후예는 이런 방법으로 관광객들에게서 몇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려고 떼를 써보았던 것이다. 그가 불쌍했던지 모두 나온 다음에 일행 중 한 사람이 1달러 지폐 몇 장을 그 청년에게 쥐어주고 나왔다.

밖으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런데 버스에 승차하기 전 역시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동예루살렘을 관광하는 동안 잠깐 고용했던 현지인 가이드가 다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약속했던 안내 수고료보다 곱절이나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지역의 안내를 맡았던 서 선생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그는 생각보다 쉽게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 약속했던 액수의 돈을 지불하자 고맙다고 인사까지 꾸벅하며 돌아섰던 것이다.

▲ 뜰안의 우물
ⓒ 이승철

▲ 마을 길가의 과일가게
ⓒ 이승철

"저 사람들에게 약속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군, 번번이 저렇게 딴소리를 하는 걸 보면, 더 주면 좋고 안 주면 그만이고, 뭐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 그냥 한 번 해보는 소린가?"

일행들이 끌끌 혀를 찬다. 잠깐 동안에 두 번이나 약속을 위반하며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그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가난이라는 굴레가 덧씌운 서글픈 삶이 만들어낸 살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일 것이다. 사실 이곳 베다니 지역은 고대부터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베다니 지역은 예루살렘의 동쪽지역으로 역시 감람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감란산 위에 올라가 있으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거의 예루살렘성이 있는 서쪽방향이다. 따라서 당시의 문둥병자나 피부병 환자 같은 전염성이 있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나 가난한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방향인 이곳에 집단으로 정착시켜 살게 했다는 것이다. 가혹한 방법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 대한 역사와 기록은 성경 외에도 서기 1세기경의 유대독립군 지휘관이었으며 후에 로마에 귀순하여 많은 역사기록을 남긴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의 역사서에 베다니 지역은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서 살 수 없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베다니 지역 풍경
ⓒ 이승철

다시 예루살렘으로 나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동예루살렘과 베다니 마을의 풍경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시지역이면서도 쓰레기가 즐비한 길거리의 풍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큰 거리도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았고, 얼기설기 막대기를 엇대어 지붕을 덮은 과일가게도 역시 가난한 풍경이었다.

동예루살렘의 베다니와 나사로의 집, 그곳에는 2천년 동안이나 가난을 대물림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난하고 힘들고 서글픈 삶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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