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무렵, 흥화진에 있던 이천 명의 용사들은 아침을 지어먹고 불공을 드린 다음 조용히 성문을 나섰다. 병사들은 절반이 노와 궁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의 병사들은 칼, 도끼 극,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말을 탄 기병은 백여 명 정도였는데 이랑이 인솔하고 있었으며 모두 각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단 5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5일이 지나면 다시 흥화진으로 돌아올 것이다. 5일 동안 죽지 마라. 살아남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싸워 이겨라."
양규의 말이라면 모두가 끝까지 싸우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병사들이었지만 양규는 이랑의 진언에 따르기로 하고 병사들에게 5일분의 식량만 휴대하도록 지시했다. 흥화진을 나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로대로 진군한 양규의 부대는 수많은 고려포로를 끌고 가고 있는 거란의 부대와 맞닥트렸다.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던 고려군이 불시에 나타나자 당황한 거란군은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쳐라!"
유도거와 김달치가 칼을 뽑아들고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치자 가장 사정거리가 긴 노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죽 나서 일제히 노를 쏘았다. 거란병들은 방패를 들기도 하고 몸을 엎드리기도 했지만 화살은 방패의 틈을 비집고 거란군의 빈틈을 정확히 맞추어 땅에 쓰러트렸다.
뒤늦게 말에 오른 거란병들이 고려군의 진지로 돌진을 개시했지만 고려군은 미동도 않은 채 달려오는 거란병들에게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거란병들은 고려군의 진영에 도달하기도 전에 말과 사람이 모두 화살에 꿰여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일부 거란병들은 말 위에서 화살을 쏘아 응전하기도 했으나 고려군에게 닿지 못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거란군이 도주하기 시작하자 고려군의 진영에서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자 나가자!"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사귀가 이끄는 고려병사들이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거란군의 진영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이랑이 이끄는 기병은 어느새 뒤로 돌아가 말을 타고 도주하는 거란병사들에게 화살을 쏘아 죽이고 있었다.
육탄전을 벌이기 위해 달려나간 사귀들은 말 그대로 귀신과도 같았다. 그들이 도끼를 휘두르면 거란병들은 두어 명이 한 번에 머리가 쪼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더 이상 저항할 의지조차 잃은 거란병들은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고려군의 창칼은 무자비하게 그들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 사이 억류되어 있던 고려 포로들까지 무기를 주워들고 합세해 거란군은 모조리 전멸하고 말았다.
"고려폐하 만세!"
"만만세!"
첫 싸움에서 얻은 전과는 이천이 넘는 거란군의 시체와 삼천 명의 고려 포로들이었다. 아녀자들을 제외한 고려 장정들은 자신들도 무기를 들고 따라가 싸울 것을 청했지만 양규는 이를 극구 사양했다.
"거란군들이 지니고 있던 말과 낙타, 식량을 줄 터이니 흥화진으로 가거라. 그렇지 않아도 그곳을 지킬 병사들이 모자라던 터였다."
포로가 되었던 이들을 돌려보낸 후 양규는 쉴 틈도 없이 무로대 남쪽에 있는 이수로 진군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이들이 또 다른 거란군의 후대가 포로를 이끌고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었기에 그들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수에는 과연 거란군이 포로들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선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급습이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도거의 말에 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병을 이끄는 이랑을 불렀다.
"네가 수고를 해줘야겠구나."
양규는 다른 부장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이랑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이랑은 고개만을 끄덕인 채 물러났다.
"달치는 궁노병을 이끌고 서쪽에 있는 수풀에 매복하라."
"예!"
"달치와 사귀들은 나를 따라 적의 전면으로 진군한다."
"아까 보다는 적들의 숫자가 많은 듯합니다."
김달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웅얼거렸다. 양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첫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적을 쉽게 보는 것보다는 나은 형국이다. 모두 웃는 낯으로 다시 만나자."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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