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일본 니가타(新潟)현을 강타한 지진의 영향으로 '가시와자키(柏崎)ㆍ가리와(刈羽)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누출 소식을 전한 일부 국내 신문들의 기사를 보다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일본 '원전 안전신화' 지진에 무너졌다"<조선일보>, "'원전 안전 대국' 충격"<중앙일보>, "일본 원전 '안전신화' 지진에 흔들"<한겨레신문> 등 마치 지금까지 일본의 원전들은 거의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지진 외에는 절대 안전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전 안전신화'라니? 도대체 일본에 언제부터 그런 신화가 있었나?
오히려 내가 아는 한 일본만큼 원전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빈발하고, 그것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이번 지진에 의한 방사능 누출 사건은 흔들리고 있던 일본 원전의 신뢰성에 다시 결정적 '한방'을 먹인 꼴이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원자력 선진국이다. 현재 5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가동해 전체 전력 수요량의 약 30%를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를 4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 면에서도 일본은 다른 비핵보유국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리며 단연 앞서나가고 있다. 비핵보유국 가운데 유일하게 자체 재처리 시설의 보유가 인정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지난해 완공돼 11월부터 시험가동에 들어간 아오모리(靑森)현 롯카쇼무라의 재처리공장은 연간 8t의 플루토늄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플루토늄 연료를 한번 장착하면 다시 바꿔 낄 필요가 없다고 해서 '꿈의 원자로'라 불리는 고속증식로의 원형로 단계인 '몬쥬'도 1~2년 안에 재가동시킬 예정이다. 1994년 로(爐) 안에서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임계상태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몬쥬'는 이듬해 12월 나트륨 누출사고로 운전이 중지됐다가, 2005년 최고재판소에서 가동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받고 재가동 준비에 들어갔다.
비핵보유국 가운데 유일하게 재처리 허용된 일본
그러나 일본은 원자력 분야에서 앞서가는 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와 지도층이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원자력 이용계획을 업그레이드 시켜 왔으나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 때마다 주요한 계획들이 중단되거나 차질을 빚었다.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도 완공까지 당초 계획보다 6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1995년 발생한 '몬쥬' 사고는 그 때까지 별 장애물 없이 순조롭게 진행돼오던 일본의 원자력 이용계획에 처음으로 경고음을 울린 사건이었다. 시운전 중 냉각계통의 배관온도계 꼭지가 부러져 나트륨이 누출됐고, 이로 인해 화재가 발생한 것. 당시 '실험로'를 거쳐 '원형로' 단계에 있던 일본의 고속증식로 프로그램은 일단 거기서 멈춰버렸다.
1999년 9월 이바라키(茨城)현 도카이무라(東海村)의 핵연료가공시설에서 발생한 임계사고는 일본 원전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된 직원 2명이 사망하고, 인근 주민 6600여명이 방사능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 조사에서는 도카이무라 사고 이전에도 2건의 임계사고가 더 있었으나 은폐되어온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던졌다.
1999년 6월 이시카와(石川)현 시가(志賀)발전소 1호기에 대한 정기점검 중 원자로를 정지시키는데 사용하는 89개의 제어봉 가운데 3개를 실수로 떨어뜨려 원자로가 일시적으로 임계상태에 도달했던 것으로 밝혀진 것. 이 사고는 곧바로 수습돼 다행히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으나 회사 측은 8년간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또 하나의 임계사고는 1978년 11월 2일 후쿠시마(福島)현 제1원자력발전소 3호기에서 발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야간 당직자의 기기 조작 실수로 제어봉 5개가 이탈, 7시간 반 동안 임계상태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 사고는 무려 29년간이나 은폐되어 있었다.
경제산업성 원자력안전보안원은 올해 3월 이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사고를 낸 원자력발전소들에 대한 특별 안전점검을 실시하기도 했다.
2004년 8월 와카야마(和歌山)현 미하마(美浜)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도 사망자를 낸 충격적 사건이었다. 2차 냉각계 배관에서 고온고압의 냉각수가 증기 상태로 분출해 발생한 사고로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화상을 입었다.
지역의 저항에 부딪힌 '플루토늄 연료' 사용계획
일본은 90년대 말부터 '플루서멀'이란 계획에 본격 착수했다. 플루토늄과 우라늄의 혼합산화물인 'MOX연료'를 기존 원자로의 연료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플루토늄을 연료로 하는 고속증식로 '몬쥬'의 정상적인 가동을 염두에 두고 유럽에서 플루토늄을 수입하는 한편 롯카쇼무라에 재처리공장 건설을 추진해왔던 일본정부는 쌓여가는 플루토늄의 사용처가 없어 점점 난처한 입장에 몰렸다.
그래서 서둘렀던 것이 '플루서멀' 계획이다. 고속증식로가 상용화되기 전이라도 기존 원자로에서 'MOX 연료'를 태우면 어쨌든 플루토늄의 소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초 99년 첫 가동에 들어가 2010년까지 16~17기를 가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계획은 한 곳에서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새로운 원자력발전 계획의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으면서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이 잇따라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번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가시와자키ㆍ가리와 발전소도 '플루서멀' 계획의 초기 실행 대상 중 하나였으나 지자체와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행이 미뤄져 온 경우다. 그 동안 누적된 원전 사고에 대한 불신감에다 이번 지진으로 원전의 내진설계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플루서멀' 계획은 또 다시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는 18일 이 발전소의 운영회사인 도쿄전력에 대해 안전성이 확보될 때까지 소방법에 의거한 가동정지를 명령을 내렸다. 일본 지자체가 관할 지역의 원전에 소방법을 적용해 가동정지 명령을 내린 것은 1995년 '몬쥬' 사고에 이어 두번째다.
이런 조치는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 열도 어느 곳도 지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8일자 사설에서 "이것은 경미한 사고가 아니다, 향후 일본의 원자력 발전을 좌우하는, 상당히 심각한 사태다"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잉여 플루토늄' 문제 부각될 가능성
이번 방사능 누출이 주는 충격은, 원전 설계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단층이 움직여 지진이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 그것도 원전 바로 밑에까지 활성단층이 이어져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직하(直下)형' 지진을 예상하지 못하고 내진설계를 했기 때문에 당초 상정한 기준치를 뛰어넘는 충격이 전달된 것이다.
가장 용량이 큰 1호기의 경우 273갈(gal, 중력가속도 단위)로 설계돼 있으나, 기준치의 2배가 넘는 680갈의 가속도가 관측됐다. 도쿄전력 홍보실은 "원전 설계 시에는 이번과 같은 규모의 지진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여진 분포 등으로 단층이 원자력발전소 바로 밑(直下)에 있음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원자력발전소는 바로 밑에 활성단층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입지를 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원전 설계 당시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일어난 지진들의 분석 과정에서 새로운 단층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동해와 맞닿아 있는 일본열도 북서해안 쪽 원전들의 안전을 결코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가 일본사회에 던지는 충격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느낌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인의 방사능에 대한 '공포'는 우리 감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것이 현재 진행중인 새로운 핵프로그램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 만약 고속증식로 '몬쥬'의 가동이나 '플루서멀' 계획이 더욱 지연되는 결과를 낳는다면 일본의 '잉여 플루토늄' 문제가 다시 부각될 것이다.
일본은 그 동안 유럽에서의 수입 등을 통해 40t 이상의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만 해도 핵무기 약 5000기를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 매년 8t씩 생산되는 새로운 플루토늄이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