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의 피해는 삼 천명의 거란군을 전멸시킨 데 비해 스무 명이 죽고 백여 명이 다친 정도로 경미했지만 유도거의 부상은 고려군으로서 뜻하지 않은 피해였다.
“일단 적을 추격하기 보다는 이곳에서 머물며 적의 동태를 살피기로 하자.”
유도거의 부상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양규의 지시도 있었기에 고려군은 거친 전투의 여정을 뒤로하고 전장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물론 양규는 수시로 정찰병을 보내 거란군의 진군을 감시하는데 있어 소홀하지 않았다.
“괜찮으시오?”
창에 찔려 쓰러진 유도거는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날에도 금방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유도거의 옆에는 웬일인지 이랑이 계속 붙어 극진히 간호를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일랑 병졸들에게 맡기고 이랑부장은 좀 쉬시오.”
보다 못한 김달치가 이랑에게 말했지만 이랑은 그에 따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 뒤숭숭해진 김달치는 숙영지 넓은 곳에서 칼을 휘두르며 어딘지 모르게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
“이보시오 김부장!”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달치가 고개를 돌려보니 오귀, 작귀, 하귀, 구귀 사귀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들이시오?”
“잠깐 저리 가서 우리와 얘기 좀 하십시다.”
오귀의 태도는 마치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같아서 김달치는 슬쩍 기분이 나빠졌다.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할일이지 뭘 그러슈?”
그 말에 오귀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자 작귀가 서둘러 나서 김달치를 달래었다.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 한 사람들끼리 뭘 그리 쌍심지를 돋우시우? 나쁜 일은 아니니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합시다.”
김달치는 못 이긴 척 칼을 크게 휘둘러 칼집에 단숨에 집어넣은 후 아래턱에 힘을 주고 사귀를 따라 갔다.
“이거 말이오. 장군께도 말은 했지만 김부장도 알아둬야 할 것 같수다.”
오귀가 험악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이랑 저 계집은 믿을 수 없소. 틀림없이 거란족에 빌붙은 여진족의 끄나풀이오. 내 강조장군의 휘하에 있을 때 저 계집이 강조장군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소. 예전에 여진족이 저 계집을 데리고 항복해 온 것을 모조리 참수하고 저 계집만 살려 두었다고 했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요?”
김달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귀는 오귀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은 김달치가 답답하다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아 정말 말귀가 막혔수? 그런 언제 배신할지도 모르는 년이 우리와 동등하게 부장 취급 받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외다. 뭘 그리 못 알아 들으시우?”
“당신들이야말로 답답하고 속 좁은 인간들이군,”
“뭐야?”
김달치의 느닷없는 말에 오귀와 작귀의 낯빛이 붉그락 푸르락 달아올랐다.
“지금 너희들이 이러는 게 고작 이랑부장이 여진족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는 이유와 여자라는 것 밖에 더 있나?”
“거 보슈. 김달치 저 자는 어리석어서 이렇게 말해봐야 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소.”
하귀가 이죽거리며 계속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쩌나! 달치 부장은 그 계집을 마음에 두는 모양인데 막상 그 계집은 유부장에게 마음이 있어서 간병을 핑계로 꼭 붙어 있으니 쯧쯧쯧.”
김달치는 사귀들에게 더 이상 대꾸를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서는 사귀들을 등진 채 걸어갔다. 구귀가 그런 김달치의 뒤에다 대고 외쳤다.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그런 계집 따위는 믿을 게 못돼!”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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