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은빈은행'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은빈은행'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 박철
오늘(20일) 아침 두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온 편지 봉투에 보내는 사람은 '은빈은행'이고, 받는 사람은 '김주숙 고객님께'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필을 꾹꾹 눌러 쓴 것이 우리 집 늦둥이 은빈이 소행이 분명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편지를 번갈아 읽으면 오랜만에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습니다. 이 얼마만의 웃음인지? 편지의 전문은 이랬습니다.

김주숙 고객님께.

안녕하십니까?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주숙 고객님의 은행기록에는 대출 : 3,000원 갚을 돈 : 1,000원 여름성경학교 : 10,000원이 있습니다. 총 12,000원이지만 고객서비스차 1,000원 깎아 11,000원만 내주십시오.

2007년 7월 16일∼7월 21일까지 갚지 않으실 경우 일주일에 100원으로 이자가 붙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린 점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우리은행 많은 이용 부탁드리겠습니다. 휴일 잘 보내십시오. -은빈은행-

은행 휴일 : 주말, 월요일, 공휴일


솜사탕처럼 달콤한 은빈이는 어려서부터 자기 것에 대한 셈이 분명했습니다. 늦둥이로 태어나서 그랬을까요, 일찌감치 자기 나름대로 생존에 대한 처세술을 터득했나 봅니다. 어쩌다 급한 일이 생겼는데 수종에 돈 한 푼 없어 은빈이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은빈이는 마지못해 돈을 주면서 못을 박습니다.

"아빠, 꼭 갚아야 돼요! 오늘 저녁까지 꼭 갚아야 돼요!"

나는 그런 딸년이 그리 밉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게 꼬깃꼬깃 모은 돈을 어느 때는 아내에게 전부 내놓으면서 "엄마, 돈 필요하지요? 이거 엄마가 쓰세요. 그런데 생활비로 쓰지 말고 엄마만을 위해서 쓰세요. 꼭이에요" 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때는 국밥집에 국밥을 먹는데 은빈이가 불쑥 자기 코트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빳빳한 지폐를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엄마 아빠! 오늘 국밥은 제가 낼게요" 하며 우리 내외를 감동시킨 적도 있습니다.

또 다른 편지 한 통은 내게 배달된 편지였습니다. 보낸 사람은 역시 은빈이였습니다.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 "김치"했더니 입을 꽉 다물었다. 쑥스러운 모양이다.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 "김치"했더니 입을 꽉 다물었다. 쑥스러운 모양이다. ⓒ 박철
아빠에게!

안녕하세요. 저 은빈이에요.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지금까지 아빠 말도 안 듣고 짜증부린 거 정말 죄송해요. 앞으로는 아빠 심부름도 잘하고 어리광도 안 부리는 은빈이가 될게요. 아빠 생신인데 아무것도 못 해드린 것 정말 죄송해요. 제가 대신 아빠 다리 많이 주물러 드릴게요. 아빠 항상 건강하시고 저 결혼해서 애기 낳을 때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저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아빠인데 저는 떼만 쓰네요. 53번짼가? 52번짼가? 아빠 나이도 헷갈리네요. 아무튼 진심으로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 2007년 7월 19일 금요일 아빠 딸 은빈이가 -


오늘 새벽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었는데, 지금은 비가 그치고 해가 간간이 비치고 있습니다. 집에는 아내와 나, 둘만 달랑 남았습니다. 아내가 타 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은빈이 편지로 인해 인간사 행복이 이렇듯 작은 데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아내가 '은빈은행'에서 빌린 돈을 빨리 갚아야 은빈이가 그 돈으로 내 생일 선물을 사줄 것 같은데, 아내에 빨리 갚으라고 한마디 해야 하겠습니다. 또 오늘 저녁에는 은빈이가 좋아하는 머리핀이라도 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은빈은행#편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