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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한 달 동안 5명의 한총련 관련자들이 '국가보안법' 때문에 보안수사대 등에 의해 연행됐다. 하지만 공안당국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다를 바 없는 행태라는 것이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국보법 수배자들의 과거와 오늘을 비교해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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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빛의 속도로 모든 것이 변화해온 20세기와 21세기. 하지만 이 보편적 진리에서 벗어나 요지부동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없지 않다. 그게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여기 군사독재가 온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무소불위의 전횡을 일삼던 1980년대부터 시민들의 힘으로 사회의 많은 부분이 민주화됐다고 이야기되는 2007년 오늘까지, 자그마치 20년 이상을 철옹성처럼 우뚝 서 변치 않는 '법(法)'이 있다.
아래는 그 법 때문에 세 청년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일이다.
[사례 ①] 암 수술 받은 어머니 보러 고향가던 날, 그는 남산으로
1980년대 중반 대학에 입학한 A(42)씨. 고교시절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즐겨 읽던 그는 입학 후 '민족'과 '애국'이란 단어에 매료됐다.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사상'을 가진다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때다.
1987년 폭발적으로 분출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그 연장선에서 그해 여름 결성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도 A씨는 꿈에도 그것이 '나라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학생운동 조직에서 제 나름의 '애국'을 실천하는 일이라 믿었던 탓이다.
이른바 '운동권 학생'으로 80년대를 누구보다 뜨겁게 지나온 A씨가 전대협의 간부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범법행위자'의 굴레가 씌워진 건 1990년 가을. 노태우정권은 국가보안법 7조 5항(이적표현물 제작·배포·소지)과 9조(편의제공) 위반혐의를 적용해 A씨를 수배한다. 대학생 박승희와 성용승의 방북에 연루되었다는 등의 이유였다.
그 때부터 1년여간의 도피생활이 시작됐다. 그 기간 중 어머니가 두 차례에 걸쳐 암 수술을 받았지만 병원에 가볼 수 없었다. "죽음 후에 눈물 흘리기보다 살아있는 네 얼굴을 보여다오"라며 보내온 아버지의 편지를 받던 날은 소리없이 흐느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1991년 추석. 결국 어머니의 안부가 견딜 수 없이 궁금했던 그는 고향인 강원도 C시를 찾았다. 그리고, 그 날 A씨는 연행됐다. 집 근처를 서성이던 그를 노원경찰서 보안과 형사에게 체포된 것이다. 주요 운동권 학생 체포에 특진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남산에 위치한 안기부 대공수사과에서 21일간 조사를 받았다.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라, 동료들의 은신지를 말하라"며 혹독한 구타가 이어졌다. 4명이 24시간을 돌아가며 A씨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가차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A씨는 5개월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채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엄마와 가족을 면회할 수도 있고…, 조사 받던 시기에 비하면 감옥생활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그에게 선고된 형량은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자격정지 3년이었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의 비극이 (그 법이 모태가 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는 A씨는 현재 남북교류를 위해 설립된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사례 ②] 신창원급 수배자 "3년만에 만난 동생 몰라본 게 서러워 울었다"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6기 간부였던 B(37)씨가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와 동조 2항·3항(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 위반혐의로 수배된 것은 1997년. 당시 그는 재학중인 대학의 조국통일위원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한총련 자체가 이적단체로 규정됐기에 한총련 대의원이었던 그는 공안당국의 판단으론 당연지사 '이적단체 가입자'였다.
수배를 받던 시기 그의 도피생활은 지난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에서 몸을 숨겨야했던 것. 보안수사대 형사들은 천지사방 B씨의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행방을 추궁했다. 친척들만이 아니었다. 학교 선후배들 집에도 걸핏하면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오죽했으면 B씨가 자신의 담당형사에게 호출기로 이런 음성을 남겼을까. "나는 여기 없으니, 제발 친척들과 동료들을 그만 괴롭히세요."
1999년 봄. 명동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후 노량진역으로 향하던 B씨는 그의 뒤를 미행하던 보안수사대에 의해 연행된다. 경찰은 유명했던 탈주범 신창원과 똑같은 현상금(98년 한 때 신창원과 B씨에게 걸린 현상금은 꼭 같이 500만원이었다)이 걸린 '반국가사범'의 체포에 환호했다.
노량진경찰서와 장안동 대공분실, 경상남도 경찰청을 거쳐 창원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때 할아버지가 찾아와 '한총련 탈퇴각서'를 쓰라고 안타깝게 호소하던 일이 아픈 기억으로 아직 남았다. 검찰의 강압적 조사에 항의해 수차례 단식과 진술거부를 반복하기도 했다.
더 슬픈 일은 또 있었다. 10살 터울이 나는 동생이 엄마와 함께 수감 중이던 마산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한참 크는 아이를 3년 동안 한번도 못 본 탓에 B씨는 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돌아갈 때가 돼서야 엄마에게 물었다. "저 애는 누구야?" 동생이 눈물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나야. 나 모르겠어?" 동생의 대답을 듣고, B씨는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오랫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재판. 담당검사는 B씨를 '한총련 서열 5위'로 지목하며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조사에 비협조적이라는 것 등이 높은 구형량의 이유였다. 재판부가 내린 최종판결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이후 사면복권 되고, 결혼을 한 그는 현재 수영을 좋아하는 두 아들의 아버지다.
[사례 ③] "왜 자수 안 하느냐고? 양심과 신념 때문에"
올해로 수배된 지 만 7년을 넘긴 C(32)씨는 2000년 다니던 대학 총여학생회 회장이었고, 2002년 부총학생회장이었다. C씨 역시 국가보안법 7조 2항·3항(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 위반 등의 혐의로 스물다섯에 수배자가 됐다.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였다. 그해 마흔 일곱이던 엄마는 올해 오십넷이 됐다.
"20대 때는 건강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해요. 이른 나이에 쇠락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낍니다." 하지만, 웃음마저 잃진 않았다. "제가 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엄마가 할머니가 될 텐데"라는 농담까지 던질 정도다.
하지만, C씨라고 아픔이 없었을까. 1년에 겨우 몇 번 전화로만 인사를 전하던 엄마가 수술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집이나 병원으로 가보지 못했고, 친한 친구(그 역시 국보법 수배자)의 아버지는 결국 기다리던 자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002년에는 수배자 대표로 지방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 기자회견 후 투표소로 향했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동료학생들의 호위 속에서 지하철을 탔다. 많은 시민들이 "힘내라"며 격려해주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체포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 위기에서 C씨를 구해준 건 다가서는 형사들을 사생결단으로 막아선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조그마한 몸피의 C씨는 겉보기와는 다른 강단을 지녔다. "이제 체포되거나 자수해도 실형이 선고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자수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도 늦지 않은 나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단호하게 답한다. "그건 내가 사랑한 조직(한총련)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내 발로 걸어가 탈퇴서를 쓴다는 건 양심과 신념이 허락하지 않아요."
서울 시내 모처에서 짧은 인터뷰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C씨의 수배생활과 고단할 것이 분명한 그녀의 일상을 떠올리며 기자는 잠시잠깐 쓸쓸해졌다. 그것은 동시대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헤쳐 온 젊은이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국가보안법은 독초.. 뿌리 채 뽑아낼 것"
지난 6월 한 달 동안 5명의 한총련 관련자들이 보안수사대 등에 의해 연행됐다. 그들의 체포와 구금 이유로 제시된 것이 다름 아닌 '국가보안법'. 이런 상황이고 보니 일부에선 "대선을 앞두고 공안당국이 무리한 생색내기식 수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한 공안기관의 노골적인 몸짓이라는 것.
이와 관련 한총련과 민주노동당 학생위, 한대련(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등은 '학생운동 공안탄압 분쇄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학생대책위(이하 학생대책위)'를 지난 10일 결성했다.
이들은 같은 날 발표된 기자회견문을 통해 "독초는 뿌리 채 뽑아야 다시 재생하지 않는다. 우리 진보적 대학생들은 학생대책위 결성을 통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독초를 뿌리 채 뽑아낼 것"이라 선언하며, 보안수사대 해체를 위한 1인 시위, 국가보안법 관련 토론회 개최,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투쟁 등을 예고했다.
국가보안법을 지키려는 자들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들간의 지난한 싸움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07년 7월 현재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는 모두 11명. 그중 1999년 한총련 의장을 지낸 윤기진(현 범청학련 의장)씨는 9년째 수배자의 몸으로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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