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차 앞으로!"
번뜩이는 창검이 길게 돌출되어 있는 수레가 고려군의 진영에서 쏟아져 나와 돌진하는 거란 기병을 막아섰다. 앞으로 밀려든 거란 기병은 검차의 창칼에 찔려 되려 밀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말을 멈춘 거란 기병은 말위에서 활을 날렸지만 검차위로 솟아 있는 방패로 인해 제대로 상대를 맞출 수 없었다. 오히려 고려군이 검차 뒤에 숨어 단궁으로 말위에 있는 거란병들을 하나하나씩 쏘아 떨어트리고 있었다.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거란병들은 무수한 사람과 말의 시체를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 고려 병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순간 뒤쪽에서 그를 압도할 거센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양규가 어두운 표정으로 소리치자 이랑이 말에 올라타고 뒤쪽으로 달려 나간 후 다시 급히 달려와 소리쳤다.
"큰일입니다! 거란놈들이 산을 타고 올라와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군! 거란 기병들이 다시 몰려옵니다!"
이대로라면 고려군은 포위되어 더 이상 오갈 곳이 없어지는 형국이 되고 말 것이 자명했다. 이랑이 양규에게 급히 제안했다.
"장군. 제가 구주로 달려가 김숙흥 장군에게 원군을 청하겠습니다."
양규는 이랑의 제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병사들을 둘로 나누어 앞뒤로 대처하게끔 배치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랑은 갑자기 말에 채찍질을 하더니 뒤로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저 년이 결국 겁을 먹고 도망을 치는구나!"
"거란군과 내통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사귀들은 말을 달려가는 이랑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중 오귀는 병사의 손에 들려있는 노를 빼앗아 이랑의 뒤에다가 쏘려 했다.
"무슨 짓이냐!"
유도거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자 오귀는 겨누었던 노를 물리며 유도거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졸개도 아닌 부장이 도망가는 걸 두고만 보란 말이오?"
"도망가는 게 아니외다. 필시 원병을 청하러 가는 것일거요!"
"그걸 어찌 알꼬? 헛참!"
유도거는 사귀를 노려본 후 뒤로 뛰어 나갔다. 유도거의 마음이야 이죽거리는 사귀들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고려군의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멈춰! 어디로 가는 전령이냐!"
말을 달려가던 이랑은 불과 10리를 못가서 창을 든 고려 병사들에게 가로막혔다. 그곳은 구주성으로 가는 길에서 절반정도 다다른 지점이었다.
"너희들은 어디의 군병들이냐?"
병사들은 도로 자신들에게 묻는 이랑이 뜻밖이라 서로 얼굴을 쳐다본 후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는 별장 김숙흥 장군 휘하의 구주 병사들이다! 전령은 이곳을 거치야 하니 일단 말에서 내리거라!"
이랑은 말에서 떨어지듯 뛰어내려 병사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장군이 이곳까지 와 있었는가? 그럼 어서 나를 장군께 데려가라! 한시를 다투는 일이다. 어서!"
이랑은 병사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김숙흥에게 가자마자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내었다.
"아뢰오! 소인 이랑은 양규 장군을 모시는 부장이옵니다! 지금 양규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이 거란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옵니다. 장군께서는 속히 군사를 내어 도와주소서!"
다급한 이랑과는 달리 김숙흥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옆에 둔 식은 찻잔의 뚜껑을 연후 차 한 모금을 음미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장군! 서둘러야 합니다!"
이랑이 다시 한번 독촉했지만 김숙흥은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에 수염을 쓰다듬은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다. 허나 도움을 줄 수는 없는 일이야."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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