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도시로 만들어가는 일, 그것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길을 열어놓고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하 추진단)은 해산되었다.
2004년 7월에 출범하여 2007년 1월에 문을 닫았으니 국가사업으로의 터전을 마련한 단체의 활동기간으로 보면 짧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긴장과 집중의 도를 생각하면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세월'이라 하겠다.
그랬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추진단원들은 열과 성을 다했다.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를 생활속에 잘 보존해오고 있는 전주를 전통문화의 중심도시로 세우는 일을 위해 우리는 신명을 다 바쳤다. 회의를 시작했다하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요 주말을 반납하고 전주와 전통문화 홍보에 열을 올리기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열의와 진정성에 많은 타 지역 전문가들이 감동하고 정부도 동의를 해오기에 이르렀다. 이제 '전주=전통문화도시'를 부인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의혹의 눈을 떨치지 못하던 광주가 이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으며 경쟁상대로 질시하던 경주, 부여 등도 '전주를 배우자!'하고 있는 판이다.
어떻게 이 짧은 기간동안 이처럼 광범위한 동의를 확보해낼 수 있었을까?
물론 그 핵심에는 전주가 지니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에 소외당하면서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풍부한 전통문화를 그나마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 예향으로서 그것을 생활속에 향유하며 살아가는 독특한 여유의 문화를 누려오고 있었다는 것이 일차적 성공 조건이라 할 것이다.
때맞추어 전통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성공 배경으로 꼽힐만하다. 민족 정체성의 원천이요 국가 자존심의 근거인 각 민족(국가) 고유의 전통문화가 문화산업시대를 맞이하여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를 위해 매우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주가 이러한 조건과 분위기를 적절하게 활용, '서 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추진단이 있었다.
추진단의 전략적 구성
추진단은 그 구성에서부터 혁신적이요 전략적이었다. 그 모태는 전주시지역혁신협의회 문화영상분과. 이 분과에서는 여러 차례의 논의를 통해 전주시의 전략적 사업으로 전통문화와 영상을 선정하고 효율적 논의를 위해 두 개의 TFT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통문화 TFT를 진행하면서 전통문화 관련 전문가로는 전략적 대응을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 전문가들은 해당 전문영역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이 판단이나 기획 능력은 그렇다 치고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주를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세우기 위해서는 정부나 타 지역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에만 관심을 집중했던 것이다. 회의와 토론을 거듭해도 논의는 겉돌기만 했다. 실질적인 추진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중대결심'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결심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영역별로 할당 배분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종합적 판단과 기획이 가능한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하되 홍보의 영역이 매우 중요할 것이니 실질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언론인들을 합류시킨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전주시 당국의 입장이다. 각 영역 문화예술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파격적 제안에 동의할 수 있을까? 염려는 부질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민간전문가들의 전략적 제안을 관이 혁신적으로 동의해준 것이다.
그 후유증이 간단치 않았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공자도 아닌 사람들이 전통문화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난이 난무했던 것이다. 특히 추진단장의 경우 지난 20여 년간의 경력은 도외시한 채 대학에서의 전공만 따지며 비아냥거리는 일이, 전통문화중심도시사업이 각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심해졌다. 타 지역에서는 영문학 전공자가 우리 전통문화 일에 열심인 것을 '기특해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하는 빈정댐이 잦아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런 빈정댐과 비아냥거림이 약이 된 것일까? 추진단 위원들의 팀워크는 갈수록 공공해졌다. 잘 훈련된 유격대처럼 급변하는 상황에 기동성 있게 대처했으며 그 진정성과 열의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홍보를 겸한 논리 개발과 사업 발굴을 위한 타 지역전문가들 초청 토론회에서 그들을 설득시킨 것은 정작 논리가 아니라 이들의 헌신과 열정이었다.
처음에 반신반의 고개만 갸웃거리던 문화관광부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사업을 전주가 맡아 시범적으로 해달라고 제안까지 해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시범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런 진정성과 열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몸으로 감동시키자는 전략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대목이라 하겠다.
국가사업으로서의 논리와 명분 마련
전주의 전통문화사업을 국가 정책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국가사업으로서의 명분과 논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사례나 유네스코의 정책 방향을 읽어내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뜬금없는 발상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아울러 국가가 이왕에 추진하고 있던 정책의 방향과 괘를 같이한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데에도 전문적인 역량을 모아나갔다. 결국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말하자면 '준비가 된' 전주가 대신 해나가는 것이 효율성이나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참여정부의 정책기조와도 잘 맞아떨어짐을 상기시켜나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을 해온 것이다. 사람이 먹고 살만해지면 족보를 챙긴다. 조상들의 산소도 돌보고 뒤늦게 고향도 찾아보게 마련이다.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를 경제적 여유의 부산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성장하며 자아가 싹트게 되면 누구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것이다.
나라나 민족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일정한 정치적, 제도적 안정을 이룩하게 되면 그 정체성 확립에 나서게 된다. 단순한 무력의 우열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싶어 한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을 믿고, 믿게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건국에 관한 신화나 서사시는 그러한 욕구의 산물이다. 로마 아우구스대제 시절의 '이니드'가 그렇고 조선 세종조의 '용비어천가'가 그런 '뿌리 찾기'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6~17세기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침으로써 대서양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해적국가라는 이미지를 쉽게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문화정책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영국학'(the English)의 대대적인 붐 조성도 문화적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적 배려라 할 수 있다. 식민제국의 오명을 유구한 전통문화를 내세움으로써 희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재정리되고 '영문학'이 새삼 공식학문의 한 영역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 극적인 표출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망발'이라 하겠다.
20세기 초 세계의 최강국으로 우뚝 선 미국이 펼친 '미국학'(the American Studies) 붐 조성 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와 전통문화가 비교적 일천하다고 할 수 있는 미국이기에 이 일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현재 집요하게 '동북공정'을 펼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는 7월 28일은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한옥마을에 터를 잡은 지 3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 우리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해온 이 단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문을 닫은 지도 꼭 반년이 지났다. 2년 반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동안 이 추진단은 실로 기적과도 같은 성과들을 일궈냈다. 그 결과 전주를 전통문화도시로 만든는 일이 국가사업으로 반영이 되었으며 이를 견인한 추진단도 지역혁신의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위 글은 지난 7월9일~13일까지 진행된'2007년 전라북도지역혁신대회'에서 혁신수기 부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다른 지역이나 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으로서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두 번에 걸쳐 싣는다.